“난 평생 프라이드치킨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천재 피아니스트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 분)는 KFC 프라이드치킨을 권유하는 운전사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 분)에게 이같이 말한다. 또 한 번의 권유에 돈 셜리는 담요에 기름이 묻으면 곤란하다고 거절한다. 끈질긴 설득에 그는 마지못해 닭 다리 하나를 건네받고 당연하다는 듯 묻는다. “칼과 나이프는 없나요?”
교양과 우아함의 결정체 돈 셜리는 쇼팽과 베토벤을 누구보다 훌륭하게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다. 미국 주지사, 법무부 장관 앞에서는 물론 백악관에서도 공연하는 돈 셜리는 카네기 홀 꼭대기 층에 살며, 상위 1%의 삶을 누린다. 하지만, 공연이 끝나고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하위 1%의 삶으로 역전된다. 공연장 내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고, 밤 12시 이후 돌아다닐 수도 없으며 일반 호텔에서 머물 수도 없다. 그는 ‘흑인’이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 투어를 준비하는 돈 셜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그린북’이다. 인종차별이 합법이었던 1960년대, 유색인종은 백인이 주 고객층인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출입을 거부당하기 일쑤였다. 이에 빅터 휴고 그린이라는 흑인 우체부는 유색인종도 편하게 여행을 즐기자는 취지로 그린북을 만들었다. 그린북은 유색인종 전용 숙박시설과 음식점 등을 소개해 둔 일종의 여행 가이드북인 셈이다.
우리나라에도 그린북이 존재한다. 여행 가이드북이 아닌 일종의 경제 가이드북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열리기 전 매월 기획재정부가 발간하는 경제 동향 관련 보고서를 그린북이라 부른다. 기재부는 보고서를 통해 민간소비, 설비 투자, 건설 투자, 수출입, 산업 생산, 서비스업 등의 분야에 대한 동향을 분석한다. 보고서의 초록색 표지 색깔 때문에 그린북이란 이름을 붙였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ed)가 발표하는 경제 동향 보고서인 베이지북에 빗댄 이름이다.
지난달 11일 기재부는 ‘2019년 1월 최근 경제 동향’ 그린북을 발표했다. 기재부는 그린북에서 “수출과 소비가 견조한 흐름을 이어가고 있지만, 투자·고용이 조정을 받는 가운데 미·중 무역갈등, 반도체 업황 등 불확실성이 지속하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기재부가 그린북에서 반도체 업황에 대한 우려 시각을 담은 것은 최근 몇 년 새 처음이다. 특히, 그린북이 특정 업종의 업황을 지적하는 것 자체가 드문 일로, 그만큼 반도체 업황의 전망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반도체 출하지수는 지난해 11월 전월 대비 16.3% 떨어지면서 9년 11개월 만에 최대폭으로 하락했다. D램 최대 생산 기업인 삼성전자의 지난해 4분기 매출액은 59조 원, 영업이익 10조8000억 원이다. 영업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28.7% 감소한 수치로, 전체 영업이익 80%를 차지하는 반도체 부진이 삼성전자 실적 하락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된다. 삼성전자 분기 영업이익이 14조 원을 밑돈 것은 2017년 1분기 이후 7분기 만이다.
수출 지표 역시 좋지 않다. 지난해 12월 수출은 전년 대비 1.2% 감소했다. 자동차와 선박 수출이 늘었지만, 가전제품과 무선통신기기 수출 실적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외에 현재 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지표인 동행지수 순환변동치는 지난해 11월까지 8개월째, 향후 경기를 예측하는 지표인 선행지수 순환변동치는 6개월째 각각 하락했다.
영화 속 그린북과 기재부 그린북의 공통점은 현실을 직시하게 해준다는 점이다. 토니 발레롱가는 돈 셜리의 남부 투어 내내 작은 글씨의 그린북을 들여다보며, 유색인 전용 숙소를 찾아 돌아다닌다. 그의 입에서는 “불편하다”는 말이 계속 쏟아진다. 그린북 존재 자체가 피부색으로 사람의 계급이 정해지던 ‘불편한 시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기재부 그린북 역시 현 경기의 흐름을 그대로 보여준다. 투자자들은 투자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하고, 국가는 이에 맞는 경기부양책을 내놓을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보고서 존재 자체가 미중무역 갈등과 글로벌 경기 침체라는 불편한 경제 상황을 담고 있다. 유색인종의 그린북이 궁극적으로는 안락하고 편안한 여행을 최종 목표로 하고 있듯이, 기재부의 그린북도 한국경제의 활력이라는 목표에 이바지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