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봄날의 산책

입력 2019-03-2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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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황사와 미세먼지가 훼방을 놓고, 꽃샘추위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매화가 피었다. 며칠 전 나는 파주 출판단지 안을 산책하다가 검은 매화나무 가지에 핀 하얀 꽃잎을 바라보며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반갑구나, 매화야! 도대체 검은 매화나무 가지 어디에 저토록 흰빛이 숨어 있다가 나오는 것일까? 귀때기가 떨어져 나갈 듯 추웠던 지난 겨울의 어느 날이 떠오른다. 한파가 몰아치던 날 두꺼운 외투로 몸을 꽁꽁 감싸고 추위에 떨며 걸었다. 새벽에 깨어나면 다시 잠들지 못하고 불안에 감싸여 어둠 속에서 유령처럼 서성거렸던 시간들. 먼 고장에서 오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나는 봄을 기다렸다. 이제 봄빛은 도처에서 화사하게 빛나고, 뺨을 스치는 바람은 따뜻하다. 사방에서 폭죽처럼 터지며 넘쳐나는 일조량이 내 기분을 기쁨으로 채운다. 더구나 봄은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펴고 씩씩하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걷기에 좋은 계절이 아닌가!

날이 풀리면서 틈만 나면 집을 나와 걷는다. 산책의 시간은 노동의 시간과는 결이 다르다. 노동의 시간이 생산성과 효율성에 얽매인 채 몸을 경련하듯이 쓰는 목표 지향적인 시간이라면 산책의 시간은 스스로에게 어디 매인 데 없는 느긋하고 고요한 평화를 베푸는 지복의 시간이다. 일에 매달리는 작업장에서는 계절의 흐름을 알지 못하고, 계절의 고유한 빛과 소리들이 어우러져 만드는 세계의 찬란함을 자각하지 못한다. 존재가 오롯하게 자기 안에서 머무르는 느긋함 속에서만 우리는 계절의 변화와 울림을 알아차린다. 산책은 우리를 노동의 매임에서 풀어줘 자유를 허용한다. 산책의 시간은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데, 우리는 그 느림에 몸을 맡긴 채 머뭇거림과 수줍음 속에서 사색의 시선을 계절의 변화에 맞추는 것이다.

걷기의 동력은 머물러 있음을 끝내는 움직임, 요동, 변화의 충동에서 나온다. 걷는 동안 심장 박동이 올라가고 혈액순환은 빨라지면서 기분 전환이 되는 것이다. 걷기에 필요한 근육을 쓰면 둔중하던 몸도 가벼워진다. 앞을 향해 내딛는 걸음이 영혼 안에 깊이 잠든 새들을 깨운다는 걸 느낀다. 걷는 동안 무겁고 어수선한 내 머릿속에서 그 새들이 깨어난 공중으로 솟구친다. 걷기는 사유라는 특권을 되살리고, 더 나아가 몸의 무뎌진 직관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날카롭게 일깨운다. 우리는 걷는 동안 사물, 습관, 생각, 도덕, 믿음 따위를 꺼내서 새로 빚는다. 걷기는 세계와 맞서는 존재의 약동이며 도약이다. 나는 걷는다, 고로 나는 살아 있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도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이렇게 썼다. “야외에서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가운데 구상되지 않은 어떤 생각도 믿지 마라. 또한 근육이 춤추는 가운데 구상되지 않은 어떤 생각도 믿지 마라.” 니체는 서재에서 낡은 서책을 뒤적이며 쓴 글을 믿지 않았다. 오직 몸을 움직이며 얻은 발랄하게 생동하는 지각(知覺)들, 몸과 피로 이루어진 사유만이 진짜라고 말했다. 니체는 산책을 좋아했다. 그는 자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전망이 좋은 고산 지대와 언덕들, 경관이 수려한 바닷가나 호숫가를 찾아 걸었다. 스위스 질스마리아의 호수들, 돌로미티 산맥, 지중해 절벽들, 이탈리아의 토리노나 제노바, 프랑스의 니스와 망통 같은 도시를 하염없이 걷고, 걷는 동안 떠오른 생각들을 노트에 적었다. 니체의 가장 핵심적인 ‘영겁회귀의 철학’도 산책에서 얻은 결실이다.

“언제까지 금지된 것을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가엾은 무릎을 펼 우리의 안식처는/어디란 말인가. 우리를 지탱하는 십자기둥은/언제나 노 젓는 것을 멈춘단 말인가.//이제껏 겪어온 고통에게 언제까지/의문 부호를 찍어야 하는 건지…/우리는 너무도 많이/식탁에 앉아 쓰라림을 삼켰다. 배가 고파/한밤중에 잠 못 이루고 우는 어린애처럼…//영원한 아침나절, 우리 모두 아침을 거르지 않고/서로를 마주볼 수 있게 되는 건 언제쯤일까./이 눈물의 계곡으로 데려와 달라고 한 적이 없는데,/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팔꿈치를 괴고/눈물에 젖어, 머리 숙인 패자가 되어 하염없이/묻는다. 이 만찬은 언제야 끝나려 하는가?//술 취한 사람 하나가, 우리를 비웃더니, 다가왔다가/멀어진다. 쓰디쓴 인간의 본성이 만든/무덤을 왔다가 가는 검은 숟가락처럼…/그 시커먼 존재는/이 만찬이 언제 끝날지 더더욱 모른다.(세자르 바예호 ‘불행한 만찬’)

나는 산책을 끝내고 단골로 드나드는 출판단지 안의 한 카페에 들러서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오늘 산책을 나서며 집에서 들고 나온 책은 세사르 바예호(1892~1938)의 시집 ‘오늘처럼 인생이 싫었던 날은’이다. 카페에서 숨결을 고르고 들고 온 시집을 펼쳐 소리내지 않은 채 눈으로만 읽는다. 바예호는 페루의 광산촌에서 태어난 시인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과정마저 마치지 못한 채 집에서 독학했다. 부친의 일을 돕다가 의대(醫大)에 진학하지만 역시 중도에 그만두었다. 여러 대학을 전전하다가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사탕수수 농장에서 회계 보조로 일했다. 23세 때부터 시인들과 교류하며 신문과 잡지에 시를 기고했다. 바예호 시집을 읽는 시간은 한가로움과 안식, 그리고 고요한 몰입으로 채워진다. 시를 읽는 동안 먼 데서 봄비가 내리듯 귀의 달팽이관에 고요가 차오른다.

금지된 것을 기다리며 고통 속에서 궁지에 몰린 채 사는 것은 ‘불행한 만찬’을 받는 것과 같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전의 필요와 기본적인 욕구를 해결해줄 최소한의 벌이에 속박된 채 살아야 하는지를 나는 잘 안다. 누구나 삶은 고단하고 괴로운 것.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 직장에서 보람이나 큰 기쁨 없는 노동에 매인 노동자들. 우리는 한밤중에 배가 고파 잠 못 들고 칭얼대는 어린애와 같이 이 세계에서 고단한 노동과 크고 작은 불행에 반응하며 산다. 우리는 얼마나 오랫동안 팔꿈치를 괴고 머리 숙인 패자로 살아야 하는가? 누구도 생(生)이라는 이 ‘불행한 만찬’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 그러나 언제까지 ‘불행한 만찬’ 앞에서 한숨을 쉬고 괴로워할 수만은 없다. 니체는 쓴다. “오늘 웃는 자가 최후에도 웃는다”라고! 웃음이 삶의 무거움을 덜어낼 명약(名藥)이라면 웃자. 더 자주, 더 크게 웃자. 더 멋진 건 함께 웃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출판단지 안 하천에 야생 오리들이 떠 있는 걸 보았다. 하천 안쪽으로 마른 갈대들이 서 있고, 작은 둔덕에 밀집한 버드나무 가지마다 연두색 물이 올라 있었다. 산책하는 동안 몸에 걸친 불행과 나쁜 기억이라는 축축한 옷들을 말린 느낌이다. 덕분에 산책을 끝낸 뒤 살아 있다는 감각은 더없이 생생해지고 기분은 한결 나아졌다. 낮 시간이 길어진 탓에 아직 날은 밝다. 해는 완전히 사라졌다. 대기에 남은 마지막 빛이 낮은 고도로 깔리면서 버드나무 그림자가 늘어지고, 서편 하늘에는 노을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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