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자(創業者)의 성공과 수성자(守成者)의 길
스물여섯 나이로 中 부호랭킹 1위에
양후이옌은 2018년 중국 여성으로는 최고의 부호 자리에 올랐다. 일반적으로 여성 부호라고 하면, 슈퍼우먼으로서의 강인한 이미지가 연상된다. 그런데 양후이옌은 수려한 용모에 시종 미소를 잃지 않는 대단히 ‘여성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본래 교사가 꿈이었던 그녀는 2004년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시장물류학과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비구이위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녀가 회사에 들어온 뒤 그간 대충대충 처리되었던 회계 업무가 당장 ‘정규화’되었다. 업무 처리에도 능해 노련하고 기민하며 장악력이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양후이옌은 중국의 ‘재벌 2세’인 이른바 ‘푸얼다이(富二代)’ 중에서도 최고 부호로 꼽힌다. 그녀의 남편은 베이징의 명문 칭화대학 출신으로 미국에서 유학한 수재이다.
비구이위안 창업자이자 양후이옌의 부친인 양궈창(楊國强)은 2007년 양후이옌에게 자신이 보유한 모든 주식을 넘겼다. 그녀는 스물네 살 때인 2005년에 양궈창으로부터 경영권을 물려받아 기업 주식의 70%를 보유하고 있다.
“마치 배추를 팔듯이 집을 판다”
양궈창은 본래 광둥(廣東)성 푸산(佛山)시 순더(順德)구의 가난한 농민 출신으로서 17세까지 신발도 신지 않았고 새 옷도 입지 않았다. 성년이 된 뒤, 그는 미장공으로 일했다. 한 달 일해 봤자 그가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겨우 180위안(元),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3만여 원에 지나지 않았다. 양궈창은 당시를 회상하며 “이 무렵 하루에 고작 5전(우리 돈으로 100원이 채 되지 않은 금액)을 벌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던 생활에 절망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랬던 그가 2006년에 받았던 연봉은 무려 146만 위안(약 3억 원)으로 당시 중국의 개인 기업 납세액 1위였다.
그의 사업이 처음부터 순탄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 맨 밑바닥에서 몸을 일으킨 그는 몇 년 동안의 신산을 겪은 끝에 자립하여 건축회사를 차렸다. 그리고 1990년대 초에 고향 비장(碧江) 강과 구이산(桂山) 산 사이의 황무지를 개간해 대규모 주택단지를 개발했다(회사명 비구이위안(碧桂園)도 비장(碧江)과 구이산(桂山)의 앞 글자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지만 이 무렵 중국의 부동산시장 거품이 전국적으로 꺼지면서 비구이위안 4000채 중 겨우 3채만 팔렸다. 처참한 성적이었다. 이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양궈창은 기자 출신의 왕즈강(王志鋼)이라는 사람을 찾아내 그에게 지혜를 구했다. 그는 귀족국제학교를 세울 것을 제안했다. 부자들의 자녀들을 입학시키고 부모들로 하여금 집을 사서 같이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대성공을 거둬 그의 4000채에 이르는 집은 순식간에 동이 났다. 뿐만 아니라 당시 학생 1인당 30만 위안의 교육 비축금을 내고 졸업 때 도로 이 돈을 받아갈 수 있도록 했는데 이자도 없었기 때문에 당시 자금난에 빠져 있던 비구이위안에 금싸라기 같은 유동자금을 제공하였다.
그 뒤 2001년 광저우 근교에 대규모 별장 단지를 조성해 분양했는데, 이때 1분에 한 채씩 팔려나가 하루 판매총액이 7억5000만 위안(약 1350억 원)에 이를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중국에서 지금까지 이 기록은 깨질 수 없는 ‘신화’로 통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그들은 마치 배추를 팔듯이 집을 판다”는 말까지 나왔다.
성공 비결은 생산원가를 낮춘 것
성공의 비결은 무엇보다도 저렴한 분양가격이었다. 일반 서민들이 거주하는 허름한 집보다 오히려 더 저렴할 정도였다. 비구이위안그룹은 평소 전국적으로 도시 근교의 황무지와 같이 버려진 저렴한 토지를 대규모로 매입해 토지 보유 면적이 중국에서 가장 많은 부동산기업 중 하나로 손꼽혔다. 게다가 비구이위안은 설계부터 건축, 실내장식은 물론이고 자체적으로 시멘트 공장도 갖추고 있으며, 심지어 벽돌까지도 자체 생산하면서 ‘주택공장’이라고 불릴 만큼 상품처럼 주택을 ‘생산’했다. 그러니 생산원가가 낮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비구이위안이 지은 주택들이 지나치게 실용적이어서 ‘낭만’과 ‘격정’이 전혀 없다는 비판도 없지 않지만, 분명한 것은 남보다 훨씬 낮은 분양가격이 강력한 경쟁력으로 작동하였다는 사실이다.
“가장 촌스러운 중국 최고 부자”
매우 조용한 성격인 양궈창은 절대 언론과 인터뷰를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생활 태도도 대단히 검소해서 평소 지극히 평범한 자동차를 타고 다니고, 옷도 특별히 눈에 띄지 않게 입고 다녀 아무도 그가 거대 기업 총수인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다. 오죽하면 그를 “가장 촌스러운 중국 최고 부자”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중국에서 설날, 춘제는 가족 전체가 모여 떠들썩하게 즐기는 대명절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그는 가족이 아니라 회사의 핵심 참모들과 모임을 갖고 새해의 사업 방향을 논의한다. 출장이 없는 날에는 분양 현장을 찾아 모퉁이에 앉아 조용히 매매 현황을 관찰한다. 양후이옌 역시 조용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점에서 아버지를 꼭 닮았다. 사람들은 세계적인 검색엔진 구글이나 중국의 최대 검색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 그들 부녀를 검색해도 석 줄 이상의 내용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며, 그들 부녀를 “몸을 숨긴 은신(隱身) 부호”라고 부른다. 어떤 네티즌은 “아마도 FBI가 그들을 지켜주는 것 같다”라고 농담조로 말하기도 한다.
양궈창은 빈궁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결코 재물에 탐욕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그는 20년 넘게 거액을 기부하고 있으며, 매년 60세 이상의 고향 노인들에게 무료로 경극 관람을 시켜주고 있다. 또 고향의 많은 사람들에게 비구이위안의 일자리를 제공하였다. 2015년 그는 국가로부터 빈곤퇴치창신(創新)상을 수상하였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
노자의 ‘도덕경’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나에게는 세 가지 보물이 있어 그것을 잘 지키고 보존한다. 첫째는 자애이고, 둘째는 검약이며, 셋째는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我有三寶, 持而保之. 一曰慈, 二曰儉, 三曰不敢爲天下先). 자(慈), 검(儉),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
노자가 말하는 세 가지 보물 중 ‘자(慈)’는 ‘동정’과 ‘화(和)’를 가리키며, 다음으로 ‘검(儉)’은 ‘검약’과 ‘절제’의 의미다. 마지막으로 ‘불감위천하선(不敢爲天下先)’은 ‘다른 사람들의 뒤에 그리고 아래에 처한다’는 원칙이다. 양궈창은 이러한 보물의 원칙에 부합할 만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창업은 쉽고 수성은 어렵다(創業易, 守成難)”고 했다. 양후이옌이 회사 경영을 맡은 이후 비구이위안은 종전의 가족경영 기업에서 현대적 기업으로 전환하고 있으며, 또 종전의 ‘공장 생산’의 모델을 탈피해 ‘개성화 생산’의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맨손으로 기적을 일궈낸 창업자 양궈창과 미국 대학에서 현대 교육을 받으며 ‘육성된’ 수성자(守成者) 양후이옌은 현대 중국에서 두각을 나타낸 경제인물의 한 전형으로서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많은 중국인들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