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 반환점 돈 산은 회장
◇소신과 원칙… “이대로 가면 필패(必敗)” = 기업의 구조조정 중 가장 어려운 상황은 산업 구조조정과 묶이는 경우다. 산업 자체가 아니라 일부 개별회사가 어려워진 경우에는 국내외 회사들이 사들일 유인이 높다. 구조조정에서도 큰 출혈은 안 일어날 수 있다. 반면 산업 자체가 침체기에 있는 경우 구조조정이 길어지고, 그 피해가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인수를 희망하는 민간자본이 없기 때문이다. 임병철 금융연구원 상임자문위원은 “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는 이해관계자들의 입장차 등 딜레마에 빠지기 쉽다”고 말했다.
이 회장이 최근 잇따라 구조조정 이슈에서 중심에 섰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그만큼 한국의 기간산업들이 침체기에 빠져 있는 상황이다. 장기적인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이 회장의 뚝심있는 ‘원칙주의’가 효과적인 결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대로 가면 필패다.” 최근 대우조선해양 민영화 방안을 발표한 뒤 연 기자간담회에서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노조와 지역사회의 거센 반발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당시 대우조선해양이 현대중공업과의 합병 과정에서 대규모 구조조정이 일어날 것이라는 우려가 경남지역을 휩쓸고 있었다.
이 회장은 “조선업 일부 인력은 벌써 부족한 상태다. 특히 연구 쪽이 부족하다”며 “더 이상 놔두고 있다간 조선산업이 붕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밝히며 이같이 말했다. 이 회장이 과거 ‘진보적 성향’의 학자로 분류됐던 것을 고려하면 이런 발언과 행보에서는 ‘원칙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난다. 다양한 가치판단들보다 원칙을 최우선하는 모양새 때문이다.
이 회장은 과거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 몇몇 요직을 거쳤다. 1998년 청와대 행정관에 발탁됐고, 2003년 노무현 정부 인수위원회에서 관련 정책의 기반을 다졌다. 특히 이 회장은 당시 강도 높은 재벌개혁을 주장했다. 금산분리를 강조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강화해야 한다는 강도 높은 재벌개혁 주장을 펼쳤다.
한 야권 관계자는 “이동걸 회장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라면서 “과거에는 노조 친화적이고, 진보 성향이 뚜렷했지만 지금 산은 회장직을 하면서는 오히려 그런 성향과는 반대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대우조선해양뿐만 아니라 금호타이어, GM 사태 때도 이 회장은 책임과 고통분담 등의 원칙을 고수하며 사태를 이끌어갔다. 노조와는 늘 대화를 강조하면서도, 필요할 땐 강하게 밀어붙이는 모습도 보였다.
◇변화와 혁신… “구조조정, 만족할 만큼 했다” = 이 회장이 기자들과 만날 때마다 강조하는 것 중 하나가 ‘변화’와 ‘혁신’이다. 실제로 이 회장은 4차 산업혁명과 같이 한국 산업의 미래를 다룬 강연과 책들을 종종 찾는다. 이런 점이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최근 산은이 강조하고 있는 ‘혁신기업 성장 지원’이다. 하지만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이런 방향성은 드러난다. 산업의 미래 모습을 그리며 구조조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평가다.
GM 사태 당시 이 회장은 “자동차 산업이 어떻게 될지, 전 세계 산업구도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라며 “생산법인과 연구법인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게 10년 뒤를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말했다. 당장 자금을 풀어 구조조정을 최소화한다고 해도 혁신과 변화가 없다면 언제고 망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회장은 4차 산업혁명을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그는 “4차 산업혁명의 파고가 높은데 이에 대처해서 전통재래 산업도 빨리 변신해 나가야 한다”면서도 “우리 경제에서 그런 것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기업이 구조조정 기업”이라고 지적했다. 구조조정 빨리 마무리하고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하지 못하면 구조조정 자체가 실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우려다.
업계 관계자는 “이 회장은 실무적인 업무에서도 학자 출신이라는 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며 “임기 내에 어떤 성과를 내거나, 내세울 만한 공을 이뤄내는 것보다는 국내 산업 전반적인 현황과 전망 등을 고려해 장기적인 안목으로 결단을 내린다”고 평했다.
남은 임기 동안 이 회장의 구조조정 업무에서 큰 이슈는 현대상선 정상화와 대우조선 민영화 마무리, 그리고 대우건설 매각 정도다. 그는 최근 기자들과 만나 “구조조정에서 진전된 부분도 있고, 스스로 만족할 만큼 했다고 본다”며 “대우건설은 큰 무리 없이 끌고가다 매각만 성사시키면 되고, 현대상선 정상화를 위해 내부 개편 열심히 하고 있다. 대우조선 민영화, M&A 건만 완수되면 큰 획은 긋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