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리디노미네이션(Redenomination)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가까운 시일 내 추진할 계획도 없다”고 말했다. 18일 통화정책방향 설명회 자리에서다. 이 총재는 지난달 국회 업무보고 때 “리디노미네이션을 논의할 때는 됐지만 장단점이 있어 신중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후 논란이 촉발되고, 정치권에서 공론화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다음 달 13일 리디노미네이션에 대한 정책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리디노미네이션은 화폐가치는 그대로 두고 액면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예컨대 현재 1000원 단위를 10원, 또는 1원으로 낮추는 식이다. 우리 화폐단위의 변경 필요성은 오래전부터 제기됐다. 2003년 박승 당시 한은 총재가 처음 리디노미네이션을 주장했으나 물가상승 우려로 흐지부지됐다.
리디노미네이션을 찬성하는 쪽은 우리 화폐의 표기단위가 너무 높아 금융거래와 통계의 불편이 크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달러당 환율이 원화만 네 자릿수로 국격이 떨어진다는 점을 든다. 원화는 1962년 화폐개혁 이후 단위가 변하지 않은 까닭에 경제지표나 회계, 금융거래 등의 단위가 조(兆)의 1만 배인 경(京)을 넘었다. 작년 우리나라 총금융자산은 1경7148조 원에 이르렀다. 1경은 0이 무려 16개나 달린 숫자다. 그동안의 경제규모 확대, 소득증가 및 물가상승 등을 반영해 화폐단위를 낮춰야 한다는 논리다. 지하경제를 양성화하고, 내수 경기 부양과 일자리를 창출하는 효과도 기대한다. 우리 경제 위상에 걸맞은 리디노미네이션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당장 서민 생활물가를 자극하고, 부동산 가격 상승을 부추길 우려가 크다. 새로운 화폐 제조 및 교환, 회계 혼란, 금융기관 컴퓨터시스템과 현금자동입출금기(ATM) 변경 등에 따른 사회적 비용이 막대하다. 직간접 비용이 10조 원을 훨씬 웃돌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 경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다. 비용과 편익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도 이뤄져 있지 않다.
지금 그렇지 않아도 경기가 크게 침체돼 있고 불확실성만 커지고 있는 상황에 금융 혼란 등으로 경제를 더욱 가라앉힐 가능성이 높다. 한은은 올해 성장률 전망치를 1월 2.6%에서 3개월 만에 2.5%로 또 낮췄다. 이주열 총재는 “경제여건이 매우 엄중해 리디노미네이션보다는 경제활력과 생산성 제고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섣부른 리디노미네이션은 경제와 시장에 엄청난 충격이 불가피하다. 리스크만 크고, 원화의 위상 제고나 내수 진작, 지하경제 양성화 효과 등은 피상적이다. 논의는 바람직하지만, 경제적 편익에 대한 심층 연구와 함께 우리 경제가 안정적인 회복세로 돌아선 것을 확인한 뒤에 추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