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 서촌 한옥마을에 거주 중인 A 씨는 쿵 하는 소리에 놀라 집 밖을 뛰쳐나왔다. 밖에는 굴삭기가 이웃 중인 한옥 3채를 부수고 있었다. A 씨는 “이전에 인부들이 와서 지붕 위 기와를 수거하길래 보통 한옥이 그렇듯 기와를 교체하는 줄 알았다”며 “철거 중인 한옥 중에는 100년도 더 된 것이 있어 마을주민 모두 망연자실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철거 후도 설상가상이었다. 100년 한옥을 밀어낸 자리에 12m 높이의 신식건물이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이다. 지난달 26일 종로구청은 이 자리에 지하 1층~지상 3층 규모의 제2종근린생활시설을 짓도록 건축 허가를 내줬다. 이에 이달 2일부터 10일까지 한옥 철거가 이뤄졌다.
A 씨는 “서촌 한옥마을은 한옥이 좋은 사람들이 모여 우리 문화를 지키는 곳이다”며 “정부도 서울시도 우리 고유의 문화를 살리는 방향으로 도시를 개발한다고 공언했지만 100년 한옥을 이토록 허무하게 허물다니 모순된 현실이다”고 지적했다.
주민들은 높은 층수의 신식 건물이 계속 들어서며 오래된 한옥을 밀어내는 분위기를 우려했다. 서촌의 경우 한옥마을로 특색있는 분위기를 형성해 외국인도 자주 찾는 관광지로 주목받고 있다. 때문에 저층 건물을 헐고 높은 건물을 세우려는 개발 수요가 존재한다.
이에 서울시도 무분별한 개발로 한옥이 사라지는 현실을 막기 위해 2016년 북촌, 인사동 등과 함께 서촌을 ‘한옥보전구역’으로 지정했다. 이 구역에 있는 한옥은 다시 한옥지정구역과 한옥권장구역으로 나뉘는데 전자의 경우 반드시 한옥만 있어야 하지만 후자는 층수 제한이 적용되더라도 건축 형태가 반드시 한옥일 필요는 없다. 위 사례가 후자에 해당한다.
지역주민들은 12m 건물을 세우면 인근 저층 한옥의 일조권을 침해하는데 이 부분에 대해 현장 검토 없이 졸속 허가가 이뤄졌다고 지적했다. 목조 구조이기 때문에 햇볕을 쬐지 못하면 집이 썩는데 구청이 탁상행정으로 한옥 주거환경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서울시가 한옥 보전에 허술하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구청이 보전구역의 한옥을 허물고 신식건물을 짓게 허가해도 막을 수 없고, 한옥 수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못 해서다. 서울시 관계자는 “항공 사진으로 보면 기와지붕이라도 내부는 한옥 구조가 아닌 경우가 많다”며 “하나하나 방문해야만 실제 동수를 파악할 수 있어 집계하는 데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한쪽에선 역사·문화적 가치 보존을 이유로 서울시가 재개발 사업을 억지로 막다가 패소한 일이 발생했다. 시가 지역민 바람에 맞지 않는 오락가락 행정을 펼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종로 사진2구역은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 건립을 추진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시는 한양도성에 인접한 구릉지 형태의 주거지로 보존해 미래 후손에게 물려줄 가치가 있다며 2017년 3월 정비구역에서 해제했다. 이에 지역민들이 행정소송을 걸어 3심까지 전부 승소하며 사직2구역은 재개발 사업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이에 같은 이유로 정비구역서 직권해제된 옥인1구역과 충신 1구역 등도 재개발 재추진 여부를 놓고 갈등이 재연될 가능성이 커졌다.
종로의 한 중개업소 대표는 “역사를 보존한다며 한쪽에선 재개발 사업을 막고, 역사를 보존해달라는 곳에선 한옥이 부서지는 걸 구경만 하고 있으니 일관성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