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교열팀장
콧물이 줄줄 흐르고 숨을 쉬기도 힘들어 병원에 갔다 왔다는 선배는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불평을 쏟아냈다. “의사들이 하는 말은 당최 알아들을 수가 없어. 부비동염이라는데, 부비동이 어딘지 설명도 하지 않더군. 무슨 동네 이름 같기도 하고….” 웃음을 꾹 참고 있다가 선배의 또 한마디에 결국 터졌다. “의사한테 논현동, 이문동은 아는데 부비동은 어딘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그제서야 ‘부비동염(副鼻洞炎)은 축농증이며, 부비동은 코 근처’라고 말하더라.”
한바탕 웃고 나니 안대를 한 후배도 종합병원 안과에서 어이없는 일을 겪고 왔다며 입을 뗐다. 전문의가 몇 가지 검사를 한 후 “맥립종이다. 당장 째고 고름을 짜내지 않으면 실명할 수도 있다”고 말해 덜덜덜 떨면서 제거 시술을 받았단다. 그러고도 불안해 ‘맥립종’이 도대체 어떤 종양이냐고 물었더니 ‘다래끼’라고 하더란다.
의사 말마따나 염증이 심할 경우 다래끼로도 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운이 나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법이니까. 그런데 의사가 처음부터 ‘다래끼’라고 말해줬더라면 환자는 편안한 마음으로 시술을 받았을 게다. 다래끼는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앓아 본 적이 있는 익숙한 염증이니까. 더군다나 40대 이상 중년들은 ‘다래끼 팔기’를 하며 깔깔거리던 세대가 아니던가. 다래끼가 나면 눈썹 하나를 뽑아 길 가운데 돌멩이 사이에 숨겨두고, 누군가 그 돌을 차면 그에게로 옮아간다고 믿었다. 바로 ‘다래끼 팔기’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일 게다. 젖니가 흔들리면 무명실 한쪽엔 이를, 다른 한쪽은 문고리에 묶어 방문을 확 열어 빼고는 온 가족이 지붕 위로 이를 던지며 까치에게 “새 이를 달라”고 빌던 시절의 이야기다.
부비동염이 축농증이며, 부비동이 몸의 어느 부위인지 아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부비동의 우리말은 ‘코곁굴’로, 표준국어대사전은 “머리뼈에 있는 공기 구멍. 위턱굴ㆍ이마굴 등으로 얇은 끈끈막에 싸여 있다”고 풀이했다. 부비동에 염증이 생겨 고름이 차면 부비동염, 우리가 잘 아는 축농증이다.
의학용어는 하나같이 한자나 라틴어, 일본식 영어 등 생소한 외래어가 뒤섞여 있다. 따라서 축농증이나 다래끼처럼 익숙한 병명도 부비동염, 맥립종 등 전문용어로 말하면 일반인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갑상선과 갑상샘도 이름이 다를 뿐 같은 기관이지만, 이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갑상(甲狀)은 갑옷 모양을 뜻하는 한자로, 갑상샘은 목 앞쪽에 위치한 나비 모양의 내분비기관을 일컫는다. 선(腺)은 샘의 일본식 용어, 샘이 순우리말이다.
어디 이뿐인가. 찢긴 상처는 열상·열창, 가려움증은 소양증, 땀샘은 한선, 땀띠는 한진, 눈꺼풀은 안검, 귓바퀴는 이개, 눈물샘염은 누선염, 어깨뼈는 견갑골 등 충분히 우리말로 말할 수 있는 것들도 병원에만 가면 어려운 한자로 둔갑한다.
대한의사협회도 ‘우리말 의학용어집’을 펴내는 등 ‘용어’ 장벽을 낮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말로 설명할 경우 미묘한 차이가 생길 수 있다며 ‘외계 용어’만을 고집하는 ‘의사 선생’들도 여전히 많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건 환자와의 소통일 터. 모든 의사가 이것만은 꼭 알았으면 좋겠다. 몸이 아파 서러운 이들과 보호자는 ‘말이 통하는’ 의사를 원한다는 걸. jsjy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