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자동차 공룡의 탄생으로 관심을 모았던 미국-이탈리아계 피아트크라이슬러오토모빌(FCA)과 프랑스 르노자동차의 합병이 결국 무산되면서 그에 대한 책임의 화살이 프랑스 정부로 향하고 있다. 르노 지분 15%를 보유한 프랑스 정부가 르노 경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이것이 오히려 르노를 업계에서 고립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에 4월부터 추진해온 일본 닛산자동차와의 합병도 아예 없던 일이 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고조되고 있다.
FCA는 5일 르노 이사회에서 합병 백지화로 결론이 나자 즉각 성명을 발표, “통합을 성공시키는 데 필요한 정치적 환경이 현재의 프랑스에는 없다”며 프랑스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이와 관련해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달 27일 FCA가 르노에 합병을 제안한 이래, 프랑스 정부가 사사건건 개입했다”고 전했다. 프랑스 정부는 르노 출신이 통합 후 새 회사의 최고경영자(CEO) 등 요직에 올라야 한다, 프랑스 정부 측에서 내세운 이사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등을 요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르노와의 합병을 성사시키기 위해 공을 들인 존 엘칸 FCA 회장 역시 실망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르노에 정식으로 합병을 제안하기 전 세나르 회장 뿐 아니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브뤼노 르메르 프랑스 경제·재무장관 등을 만나 세심하게 준비했다. 또 ‘FCA에 의한 르노 인수’라는 인상을 불식시키기 위해 통합을 제안한 5월 27일 이후에도 연일 프랑스 정부 관계자와 직접 만나 협의하고 타협점을 찾으며 양보 의사를 보여줬다고 한다.
그러나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에 따르면 르메르 장관은 엘칸 회장에게 전화로 프랑스 정부가 제시한 조건을 우선하라고 반복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FCA 측에서는 “이런 식이면 프랑스 정부가 계속해서 개입할 것이다”라며 회의감이 커졌고, 결국, 크게 실망한 엘칸 회장은 르노가 이사회에서 결론을 낸 지 불과 몇 분만에 합병 철회 결정을 내렸다.
WSJ는 프랑스 속담을 인용, “선장이 2명이면 배는 가라앉는다는데, 하물며 선장이 3명, 4명이나 되면 어떻게 되겠느냐”며 이번 FAC와 르노의 합병 무산은 예견된 일이었다고 했다.
앞으로 초점은 르노와 닛산의 경영 통합을 둘러싼 움직임이다. 르노는 4월 이후 닛산과의 통합을 위한 정식 제안서를 준비해왔다. 하지만 닛산 입장에서는 르노에 대한 불신이 커진 상태다. 자사와 합병을 준비한다더니 뜬금없이 FCA와 합병을 논의한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니시카와 히로히토 닛산 사장 겸 CEO는 6일 밤 기자들에게 이번 FCA-르노 합병 백지화에 대해 “닛산에게 좋은 결과인지는 모르겠다”며 “얼라이언스의 폭을 넓히는 건 열려있지만 파트너가 갑자기 바뀌면 누구나 신중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닛산은 FCA와 르노가 통합할 경우 새 회사 산하에서 자사의 존재감이 저하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한 닛산 관계자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이번 파혼은 우리에게는 플러스”라며 “솔직히 안심했다”고 강조했다.
업계는 FCA와 르노의 합병 논의 과정에서 닛산이 그토록 경계해온 프랑스 정부의 간섭이 어느 정도인지가 드러남에 따라 닛산이 르노와의 합병에 응할 가능성은 더 작아졌다고 보고 있다. 프랑스 정부의 지나친 경영 간섭이 르노의 고립을 자초하는 모양새다. 한 닛산 관계자는 “세나르 회장에게는 전권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며 “프랑스 정부가 주도하는 회사와의 통합은 있을 수 없다”고 역설했다.
프랑스 정부는 르노 주식 15%를 갖고 있지만, 출자 비율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큰 영향력을 갖고 있다. WSJ는 개혁파이자 친기업 성향의 마크롱 정권 하에서조차 프랑스 정부가 협상에서 이런 태도를 보였다는 건 앞으로 르노가 관련된 그 어떤 협상에도 정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긴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