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범 반도체산업구조선진화연구회 대표, 프뉴마 대표
이번 정부의 대책은 업계의 건의사항을 반영해 예산과 금융, 세제, 환경·입지 인허가, 규제특례, 테스트베드 확충 등 국가자원과 역량을 총력 투입하는 특단의 대책으로 기존의 대책에 비해 진일보한데다, 정부와 정치권이 소재·부품·장비 국산화에 강한 추진 의지를 보이고 있어 중소 업체들의 기대감이 높다.
그러나 반도체 업체 일각에서는 이번 정책의 혜택이 중소 업체들이 아니라 반도체 소자 대기업 및 계열사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규제완화 제도개선과 관련 공정거래법에서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는 계열사간 내부 거래를 허용함으로써 소자 대기업이 수직계열화를 통해 소재·부품·장비를 조달하는데 면죄부를 주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공정위는 공정거래법 제 23조의 2에 한해 ‘효율성 증대, 보안성, 긴급성 등 거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불가피한 경우로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거래는 적용하지 않는다’는 규정중 긴급성을 근거로 ‘일감 몰아주기’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시행령에 따르면 긴급성 요건은 ‘경기급변, 금융위기, 천재지변, 해킹 또는 컴퓨터바이러스로 인한 전산스템 장애 등 회사 외적 요인으로 인한 긴급한 사업상 필요에 따른 불가피한 거래’로 규정하고 있는데, 공정위는 일본의 수출규제를 긴급성 요건에 해당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이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공정위 주장대로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완화할 경우 반도체 소자 대기업이 그동안 일본에서 수입해 온 소재·부품 등을 계열사를 통한 내부거래로 조달해도 공정거래법상 일감몰아주기 규제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으로, 이는 국산화를 추진하고 있는 중소업체들이 대기업 계열사들과 납품경쟁을 해야하는 힘든 상황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시행 중에도 반도체 소자 대기업의 중소업체 줄세우기와 계열사들을 통한 납품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에서 규제마저 해제될 경우 중소업체들의 납품환경은 더욱 나빠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반도체 소자 대기업은 계열사나 특수관계에 있는 업체로부터 소재·부품·장비를 납품받는 수직계열화를 추진해왔다. 이 경우 요구하는 품질만 맞추면 되기 때문에 기술개발에 소극적이어서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경쟁 중소업체의 성장을 막는 결과를 초래했다.
일례로 국내 최대 반도체 장비업체인 세메스의 경우 경쟁기업인 삼성전자 계열사라는 이유로 SK하이닉스에서 제품 사용을 기피하는 등 수직계열화로 인한 폐쇄적인 생태계가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가로막아 왔다.
또 정부 대책중 핵심기술 인수합병(M&A) 지원 대책도 대기업 중심의 수직 계열화 강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해외 소재·부품·장비 전문기업 인수금액에 대해 대기업 5%, 중견기업 7%, 중소기업 10%의 법인세를 공제해주고, 기술혁신형 국내 인수합병의 경우 기술가치금액의 10%를 법인세에서 공제해 주겠다고 밝혔다. 이 경우 중소·중견기업에 비해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이 혜택을 누릴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을 대기업이 인수합병하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이익이 될수 있지만 중장기적으로는 경영 효율화에도 좋지 않고 중소·중견기업과 대기업이 상생하는 건실한 생태계를 만드는 데도 부정적인 영향이 불가피하다.
따라서 ‘일감 몰아주기’ 규제 완화와 인수합병 지원 대책의 경우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자금력이 풍부한 소자 대기업이 계열사를 통해 외국기업과의 합작과 국내 업체 인수합병 등을 통해 수직계열화를 강화하고 이로 인해 중소업체가 고사하는 등 반도체 생태계를 더욱 열악하게 만드는 상황을 초래할수 있다.
중소업체들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해 이를 바로잡아야 할 것이며, 정책 집행과정에서도 수직계열화에 대한 엄정한 감독과 감시가 이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