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
부끄러움은 씻어내야 한다. 마냥 국치일(國恥日)에 대한 울분을 삭이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런데 사실, 요즈음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일본으로부터 또 상당한 치욕을 당한 면이 없지 않다. 분통이 터지는 일이다. 왜 이런 일이 반복될까?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의 후안무치(厚顔無恥)함에 있겠지만, 우리의 힘이 아직 일본을 능가하지 못하는 것도 큰 원인이다. 이제, 일본의 후안무치는 탓할 필요도 없다. 아예 무시를 해버려야 한다. 대신 국치를 말끔히 씻어내고 앞으로 좁쌀만큼의 치욕도 당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 조용한 가운데 쥐도 새도 모르게 힘을 길러야 한다.
중국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외교원칙을 제시해 왔다. 덩샤오핑(등소평·鄧小平)은 1989년에 도광양회(韜光養晦) 즉 “빛을 감춘 채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르자”는 방침을 제시했고, 2003년에 후진타오(호금도·胡錦濤)는 ‘화평굴기(和平屈起)’ 즉 “평화로운 가운데 굽혔던 몸을 서서히 펴고 일어나자”는 지침을 내렸다. 최근 시진핑(습근평·習近平)은 ‘주동작위(主動作爲)’ 즉 “중국의 이익을 위해 주동적으로 행동하자”는 방침을 발표했다. 지난해 말에는 “중국은 이제 세계규칙의 추종자에서 제정자로 바뀌고 있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이 이처럼 세계질서 형성의 주동자로서 큰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바로 개혁개방 후 14년 동안 죽은 듯이 엎드려 티내지 않고 힘을 길러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힘을 자랑하듯이 과장하여 드러낸 게 아니라, 서서히 있는 듯 없는 듯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광양회도 하지 않았고, 화평굴기도 하지 않았다. 약간의 힘이 생기자 그 힘을 과장하여 자랑하기에 바빴다. 그 결과, 불필요하게 세계의 시샘을 사기도 했고, 일본에 우리의 속을 다 내보인 점도 많다. 드러난 힘은 이미 힘이 아니다. 국치를 완전히 씻기 위해서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용히 힘을 기르고 모아야 한다. 국민의 단합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