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경제가 처한 모습도 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 2·4분기 가계대출은 전 분기보다 15조4000억 원 증가했다. 가계대출 증가 폭은 작년 4분기 23조4000억 원에서 올 1분기 2조9000억 원으로 줄었다가 다시 가파르게 늘었다. 가계대출 잔액도 다시 1500조 원을 웃돈다.
고성장·고물가에서는 부채가 늘어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자리도 많고 화폐 가치가 계속 떨어져 실질적인 부채 부담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투자와 수출 부진이 이어지고, 성장률이 반 토막 난 상황에서는 얘기가 달라진다.
경기침체 상황에서는 주가와 부동산 등 자산가격은 하락하는데 물가 상승률이 너무 낮아 실질적인 빚에 대한 부담이 늘 수밖에 없다. 가계는 빚을 갚기 위해 자산을 처분하거나 소비를 줄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물가는 더 낮아지고 민간소비는 뒷걸음질 한다. 결국 자산 가격이 내려가는데 빚 부담은 늘어나는 ‘부채 디플레이션’이 나타나 물가 상승률과 성장률이 다시 낮아지는 악순환 고리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실제 한국 경제의 하향세가 뚜렷하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은 전 분기 대비 -0.4%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3분기 경제성장률 역시 0.4%(전기대비)로 뚝 떨어져 ‘GDP 쇼크’를 보였다. 덕분에 올해 2% 성장은 물 건너갔다는 얘기가 현실화됐다. 서민들은 지갑을 닫았다. 올해 들어 7개월 연속 0%대 상승률일 보이던 소비자 물가는 지난 8월 드디어 마이너스로 들어섰다. 물가가 0.038% 하락한 것이다. 지난 9월 소비자물가는 사상 처음 전년 동월 대비 하락(-0.4%)하는 충격적인 수치가 나왔다.
가계만의 문제도 아니다. 2·4분기 말 현재 기업 신용은 1885조 7000억 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금융기관의 한계기업 여신은 2018년 말 107조9000억 원으로 전년 말 대비 7조8000억 원 늘었다고 한다. 외감기업 전체 여신 내 비중도 13.8%로 전년 말 대비 0.4%포인트 상승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의 은행 시스템이 취약한 자산에 많이 노출돼 있다”면서 “기업부채가 전 세계적으로 가파르게 증가하면서 시스템적인 위기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행도 최근 전반적인 금융안정 상황을 나타내는 금융안정지수가 3년 6개월 만(8월)에 ‘주의단계’에 진입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한국경제의 현 주소는 ‘블랙스완’(예상할 수 없는 위험이 일어난)과 달라 보인다. 이미 경제전문가들과 IMF,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등이 꾸준히 한국경제를 경고해 왔기 때문이다.
중대한 위험이 눈앞에 보이는데도 그냥 지나치는 ‘회색코뿔소 위험’에 더 가까워 보인다. 육중한 코뿔소가 돌진해오면 진동과 먼지가 일어나 미리 대비할 수 있는데도 위험을 간과하기 쉽다는 게 세계정책연구소 창립자 미셸 부커의 지론이다.
한국경제가 ‘스톡데일 패러독스’에 빠질까 걱정이다. 미국의 경영학자 짐 콜린스가 한 말이다. 그는 저서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에서 스톡데일 장군과 나눈 대화를 소개했다. 스톡데일 장군은 수용 생활을 견디지 못한 사람의 특징을 묻는 말에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지 못하고 거부한 채 ‘내일이면 풀려나겠지’라고 기대만 하는 낙관주의자들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절망적인 현실을 받아들이고, 나 자신을 그 현실에 적응시켰다”며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했다.
가까운 이웃 일본이 그랬다. 일본은 1990년대 초반 부동산 거품이 붕괴하면서 ‘잃어버린 20년’에 들어섰지만, 당시 일본 경제기획청은 줄곧 실제 성장률보다 1%포인트 높은 전망치를 제시했다.
현재 우리 경제도 이와 유사한 징후들이 보인다는 점에서 긴장의 끈을 놓아선 안 된다. 정부는 2% 성장을 장담하지만, 이미 전기전자 등 주요 제조업이 흔들리고 있다. 한은에 따르면 기업매출은 1·4분기에 마이너스(전년 동기 대비 -1.5%)로 돌았다.
지금은 경제가 좋다고 말할 때가 아니다. 가파르게 증가하는 빚을 적정 수준에서 관리하고, 상환능력이 없는 한계가구나 기업 정리에도 속도를 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