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고독에의 권유

입력 2019-10-3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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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어느덧 겨울의 들머리에 섰습니다. 오늘 새벽 기온이 갑자기 떨어지면서 중부지방에 서리가 내리고 물은 얼었습니다. 낮은 짧고 밤은 길어집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우수수 떨어지던 어느 날, 늘 명랑하던 당신이 인생이 덧없다 한탄하며 “오늘처럼 인생이 외로웠던 날은 없다”고 말해서 놀랐습니다. 계절이 바뀔 무렵 우리 감정이 멜랑콜리에 빠지는 것은 우리 몸의 호르몬 분비가 일조량에 영향을 받기 때문일까요? 페루 시인 세사르 바예호는 “인간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라고 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은 외로움을 아는 존재”일 겁니다. 분명 이 세상 것이면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만 같은 착시를 일으키는 게 바로 외로움이지요.

어찌어찌하다 보니 인생의 어느 한 시절을 혼자 지냈던 적이 있어요. 혼자 밥을 끓이고 혼자 잠자리에 들던 그 시절, 나는 누군가를 간절히 그리워했으나 누군가는 멀리 있고, 내 안에서 갈망은 타올랐지만 그 존재 자체가 불명확했습니다. “신의 외로운 인간”으로 재발명되던 그 시절 내 영혼은 나무토막 같이 침울하고, 웃음은 사라졌어요. 외로움 속에 자유의 개방성이 없지는 않았지만 독신(獨身)의 외로움에 치를 떨던 그때 내 인생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덮쳤던 거지요. 근육이 통증으로 아프고, 마음은 고통으로 저며지는 듯 요동쳤지요. 겨울 한밤중 홀로 깨어 온몸을 파고드는 외로움에 진저리를 치며 머리를 벽에 쿵쿵 박았습니다. 그때만큼 외로움을 오래 숙고한 적은 없었지요.

외로움은 개인감정의 영역에 있는 것일까요, 혹은 고립이 초래하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일까요? 외로움은 실존의 불가피한 본질이지요. 그래요, 인간은 외롭습니다. 사람마다 얼마나 더 외로운가, 덜 외로운가 하는 작은 편차가 있을 뿐이지요. 절대로 외롭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인지적 감수성이 덜 발달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아요. 늘 외로움을 더 잘 느끼는 사람은 사회적 소속감 없이 표류하는 사람들이겠지요. 정서적이건 도덕적이건 자기와 타자를 향한 항상 더 높은 수준을 보여주기를 욕망하는 이들이 더 외로움을 잘 느낍니다. 그들은 일종의 완벽주의자들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높은 요구 수준 때문에 늘 불만족에서 벗어나지 못하지요.

분명한 것은 외로움이 혼자 있음이 초래한 감정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점이지요. 영어에서 외로움(loneliness)과 고독(solitude)은 별개 현상입니다. 외로움이 고독에 견줘 조금 더 부정적인 감정이라고나 할까요? 고독은 외로움의 긍정적인 양상을 드러내지요. 노르웨이 베르겐 대학 철학교수인 라르스 스벤젠은 외로움의 생물학적, 사회적, 심리적 원인을 조목조목 따지고 풀어 쓴 ‘외로움의 철학’이란 책에서 “외로움의 근간에는 결핍이 있지만, 고독은 다양한 경험, 생각, 감정에 열려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외로운 사람들이 외로움의 부정성 속에 제 내면의 짐승을 가두고 울부짖는다면, 고독은 관조적 삶을 향해, 더 나은 자아로 가는 도정을 향해 고요하게 열려 있지요. 많은 경우 외로움은 상실과 결핍에서 빚어진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하지만 외로움은 단일한 감정이 아니라 불안, 소외, 우울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감정 현상이지요. 타인을 향한 애착 욕구의 좌절이 외로움을 불러옵니다.

외로움은 기분의 일종인데, 인간이 갖는 가장 미약한 슬픔과 우울을 머금은 기분이지요. 감정(emotion)과 기분(mood)은 같은 정서 현상에 속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다릅니다. 감정은 자기 바깥의 대상을 향하여 투사되는 마음의 일렁임이라면 기분은 주관적인 마음의 흐름이지요. 감정은 바깥 세계와 자아의 만남에 잇대어지는 반면 기분은 내 안에 침잠된 느낌의 집적입니다. 기분은 사람이 세계를 향해 드러내는 감정의 한 영역이지요. 기분이 나쁠 때 우리는 자기 안으로 웅크리며 우울한 상태에 빠지지요. “기분이 더 일반적이고, 전체로서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반면에 감정은 하나의 대상 혹은 그 이상의 특정 대상(들)에 향해” 있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기분을 두고 “우리가 우리 자신 밖에서 존재하는 기본 방식”이라고 합니다. 기분은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 세계와 우리의 관계에 대한 자세, 삶이 얼마나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며 흘러가는지를 알아보는 잣대이겠지요. 철학자에 따라 외로움을 인간 실존의 기본적인 조건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인간은 살아 있는 내내 외로움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지요. 인생을 산다는 것은 어쩌면 자기 몫의 외로움을 감당하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외로움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견고한 사회관계망과 공동체에 속해 있다 할지라도 혼자 떨어져 있다는 기분을 피하기는 어렵습니다. 외로움은 개인의 타고난 성향에 따라 그 정도가 다르게 나타나겠지요. 외로움은 개인의 친화성, 외향성, 신경증의 기질에 영향을 받기 때문입니다.

라르스 스벤젠은 “외로움은 타자와의 연결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라고 말합니다. 어느 사회학자는 외로움을 사회적 외로움과 정서적 외로움을 분리해서 설명합니다. 외로움은 감정의 영역에 속해 있고, 소극적 자기 개시, 혹은 사회적 위축 속에서 출현합니다. 하지만 고독은 제게 주어진 실존의 자유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을 때 존재의 도약대가 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자아가 성장하려면 외로움의 부정성에서 벗어나 ‘고독 역량’을 키워야 하지요. 고독의 몰입에서 삶의 무의미와 싸우며, 자아를 성숙시키는 계기를 찾는 사람이 바로 ‘고독 역량’을 키우는 사람이 아닐까요? 반면 고독을 애써 기피하려는 사람은 감정적 미성숙의 징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한과 영원을 사유하는 사람, 생의 본질에 대해 사색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고독이라는 사태와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 김현승(1913~1973)만큼 고독에 민감한 감수성을 보인 사람을 찾기는 힘듭니다. 1968년에 내놓은 세 번째 시집이 ‘견고한 고독’이고, 1970년에 내놓은 네 번째 시집은 ‘절대 고독’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맹렬하게 고독의 탐구자이자 고독의 탐미자, 고독의 수호자임을 마다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고독은 정직하다./고독은 신을 만들지 않고,/고독은 무한의 누룩으로/부풀지 않는다.//고독은 자유다./고독은 군중 속에 갇히지 않고,/고독은 군중의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고독은 마침내 목적이다./고독하지 않은 사람에게도/고독은 목적 밖의 목적이다./목적 위의 목적이다.”(‘고독의 이유’) 좋은 고독은 타락한 본성에 대한 통찰의 전제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적당량의 고독은 우리를 무분별에서 벗어나게 하고, 인생을 깊게 살도록 이끄는 자양분이 되겠지요. 시인은 고독이 우리의 의지와 선택을 받는다는 점에서 자유에의 확고한 전념이고, 궁극의 목적이라고 단언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세상을 등지고 숲속 오두막의 은둔 생활을 선택한 것은 문명의 병폐에 물들지 않은 야생 자연에 삶을 의탁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만의 오롯함을 찾으려고 고독 속으로 피신한 것이지요. 고독은 번잡스러운 세상에서 한 걸음 물러앉아 사물과 사태에 대한 분별력을 높이고, 정신적 고양과 자유,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최고의 인생이라고 꼽은 관조적 삶으로 향하는 지름길이지만 어떤 사람에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 활력과 즐거움을 고갈시킬 수도 있으니까요.

겨울은 침잠과 은둔하기에 좋은 계절, 불필요한 소음과 동요에서 벗어나 자기의 ‘고독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지요. 고독 속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 자아에게 집중한다는 증거겠지요. 오늘날 같이 만성적 상호작용으로 번잡한 디지털 시대에 고독의 동굴 속으로 한 계절이나마 칩거해 보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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