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 이용한 송년회 급증…봉사활동으로 대체하기도
#. 건설사에서 2년째 일하고 있는 이희주(28ㆍ가명) 씨는 올 연말 회식 부담을 덜었다. 부서 송년회를 점심시간에 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음주량과 시간도 줄어 지난해처럼 숙취해소제를 사서 마시고, 돌릴 필요도 없어졌다.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가져온 변화다. 이 씨는 "저녁에 친구나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술도 억지로 안 마실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올해 7월 시행된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송년회 문화를 바꾸고 있다. 늦은 밤까지 이어지던 송년회를 점심시간으로 옮기고, 분위기나 결속력을 이유로 행해졌던 음주 강요와 장기자랑도 줄었다. 법 시행 이후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다만, 지방 소재 회사와 중소기업의 변화는 다소 더디다.
일부 공기업과 행정부처, 대기업은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을 계기로 사원들의 개인 시간을 보장해주려는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를 위해 퇴근 후 진행했던 송년회를 점심으로 옮겨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으로 갈음하는 추세다.
통계도 변화를 뒷받침한다. 현대백화점 12월 한 달 기준, 전국 15개 점포 식당가에 입점한 122개 레스토랑 예약 현황을 보면 점심시간(오전 11시~오후 1시) 예약 건수가 지난해보다 30.1% 증가했다. 사무실이 몰려 있는 판교점과 무역센터점 식당가 예약 건수는 지난해 대비 68.7% 늘었다. 송년회는 저녁에 해야 한다는 통념이 점차 바뀌는 것을 방증한다.
음주나 장기자랑을 강요하는 문화도 사그라지는 모양새다. 과거에는 회식이나 송년회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팀의 결속력을 위해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음주를 강요하고, 장기자랑도 준비하는 일이 잦았다. 특히, 이를 거절하면 향후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에서 이를 직장 내 괴롭힘 유형으로 분류했다. 이후 경각심이 커졌고, 강요하는 일이 줄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이 만든 '갑질 지수'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시행 이후 '회사에서 원하지 않는 회식문화(음주, 노래방 등) 강요'가 42점에서 29.9점으로 떨어졌다. '갑질 지수'가 높을수록 갑질이 심각하다는 뜻이다. 장기자랑 또한 점차 지양하고 있다고 신입사원들은 귀띔했다.
한 대기업 신입직원인 윤지훈(30) 씨는 "입사 이후 법이 시행되면서 회식자리에서 술을 억지로 먹이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 같다"고 평가했다. 윤 씨는 "연말에 계획된 송년회는 퇴근 후 저녁 시간이지만 술을 먹을 만큼만 먹으라는 지시가 있었다"며 "작년까지 신입사원이 준비했던 장기자랑도 올해부터는 폐지됐다"고 반색했다.
의미 있는 행동으로 새로운 송년회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곳도 있다.
다수의 기업이 송년회 대신 연말 어려운 이웃을 위한 봉사활동으로 대체하고 있다. 현대자동차 전주공장 기능장회는 1일 전주연탄은행과 함께 전주시 진북동 일원에서 사랑의 연탄나눔 봉사활동에 나섰다. 전북지역 소외 이웃들에게 따뜻한 겨울을 선물하자는 취지로 마련된 이번 봉사활동에는 회원 및 가족 50여 명이 참석해 송년회 비용을 아껴 마련한 연탄 2700장을 직접 실어 나르며 구슬땀을 흘렸다.
제주도공무원노동조합은 지난달 30일 송년회 대신 어려운 이웃과 지역사회를 위한 봉사활동 '사랑을 담은 김장김치 만들기 행복나눔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조합원과 가족 40여 명이 참여해 김장김치 300포기를 담가 제주시 독거노인원스톱지원센터와 초록우산어린이재단 제주지역본부, 제주이주민센터에 전달했다.
코오롱그룹은 코오롱사회봉사단 주관으로 2일부터 10일간 서울 강서구 마곡동 코오롱 One&Only 타워 등 전국 8개 사업장에서 '헌혈하고 송년회 하세요' 캠페인을 진행 중이다. 코오롱은 2013년부터 안정적인 혈액 수급을 지원하고자 꾸준히 헌혈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임직원이 기부한 헌혈증은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에 전달해 소아암을 앓고 있는 환아를 위해 쓰인다.
변화가 더딘 곳도 있다. 지방에 있는 기업과 일부 중견ㆍ중소기업에 다니는 재직자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 이후에도 전처럼 저녁 회식, 음주 강요가 자행되고 있다고 토로했다. 법 시행 자체를 모르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기업이 관심조차 없고, 알더라도 무시한다는 것.
전남 여수의 한 새마을금고에 다니는 김기동(30ㆍ가명) 씨는 "지금도 토요일에 워크숍을 간다. 개인 시간이 없다"고 목멘 소리를 냈다. 그는 "올해도 송년회 겸 워크숍을 가는데 술만 내내 마시고 빼기도 힘든 분위기다. 규모도 작고, 작은 지역사회라 이직도 어려워 문제 제기도 못 한다"고 말했다.
경기도 수원의 한 중소기업에서 2년째 일하는 최지철(31) 씨 역시 "송년회가 언제 끝날지 감도 안 잡힌다"며 "시대가 변했고, 젊은 사람들의 생각도 변했다. 일과 삶의 균형이 잘 지켜져야 일할 맛도 나고 능력도 더 잘 발휘할 수 있다"고 말했다. 회사에 대한 애정은 거기서 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