淸 제국을 기울게 만든 권신이자 탐관
화신은 만주족 출신으로서 어머니는 그가 3세 때 그의 동생을 낳다가 난산(難産)으로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는 그가 9세 때 사망하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여 관직에 나간 뒤 23세 되던 해에 포목창고의 관리를 맡는 관리가 되었는데,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포목 비축량을 크게 늘렸다. 이 무렵 그는 뒷날 엄청난 재산을 모을 수 있는 이재술(理財術)을 배울 수 있었다.
유능하고 청렴했던 젊은 시절
그 뒤 화신은 건륭제의 의장대 시위(侍衛)로 자리를 옮겼다. 어느 날 건륭제가 야외로 나가려고 시종관들에게 의장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런데 가마를 덮는 황룡산개(黃龍傘蓋)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자 화를 냈다.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황제가 크게 화를 내자 좌우 신하들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 이때 한 젊은 교위 하나가 나서며 말했다.
“담당자는 자신의 책임을 변명하지 않는 법입니다.”
이는 논어 ‘계씨(季氏)’ 편에 나오는 내용을 비유적으로 답한 것이었다.
건륭제는 학식이 깊고 풍류를 즐기던 황제였다. 건륭제는 내심 탄복을 하고는 그 젊은 교위를 불러 이름을 물었다. 바로 화신이었다. 외모도 준수했고 말솜씨 언사 또한 또렷또렷하였다. 건륭제는 다른 문제들도 물어보았는데 답변이 마치 물 흐르듯 유창하였다. 더구나 화신의 용모는 건륭제가 아직 황제가 되기 전에 연모했던 연귀비(年貴妃)와 너무 닮았었다. 그러니 화신은 본래부터 낭만적인 성격이었던 건륭제의 마음에 쏙 들었다.
화신이 처음부터 부정부패한 관리는 아니었다. 오히려 뇌물을 주어도 거절하는 청렴한 관리로 그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후 대학사 이시요(李侍堯)의 부패 사건을 조사하는 책임을 맡아 처리하는 과정에서 그 부정 재산을 몰래 착복하였다. 그런데 적발되기는커녕 거꾸로 그 사건을 잘 처리했다고 공을 인정받아 황제로부터 상금과 함께 칭찬을 들었다. 그 뒤 큰 아들과 건륭제의 친딸 화효 공주가 결혼을 하게 되자, 그의 권세는 이제 가히 하늘을 찌를 듯했다.
건륭제의 총애, 사돈까지 맺어
건륭제는 화신을 총애하여 그를 항상 옆에 있도록 하였다. 화신은 만주어와 중국어에 몽골어와 티베트어 등 4개 언어에 능통했고, 사서삼경에도 정통했으며 ‘삼국지연의’며 ‘춘추’와 ‘홍루몽’까지 두루 섭렵하고 있었다. 게다가 주자 철학까지 독파하였다. 또 시인이기도 했던 건륭제와 더불어 시를 지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었다. 하루는 건륭제가 맹자를 읽을 때, 날이 어두워서 주(注)가 잘 보이지 않았다. 화신에게 등불을 가져다 비춰 보라고 했는데, 화신이 어느 구절이냐고 묻더니 건륭의 대답을 듣고는 그 책의 모든 주를 외워서 말해 주었다. 황제가 강남(江南) 지방을 순행할 때 엄청난 자금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이때마다 돈을 만드는 데 귀신인 화신의 능력이 특별히 발휘되어 경향 각지에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건륭제는 아무 어려움 없이 강남 순행을 다닐 수 있었다. 건륭에게 그만 한 신하가 따로 존재할 수 없었다.
나라의 모든 뇌물이 화신의 손으로
어쨌든 황제와 사돈이 된 화신은 그야말로 최고의 권신이 되었다. 한림원 대학사로서 그리고 군기대신으로서 조정 대권을 한 손에 거머쥔 화신은 특히 자신을 탄핵한 바 있었던 문관들을 증오하여, 많은 문관들이 명나라를 추종하여 청나라를 비방했다는 혐의가 씌워진 채 ‘문자옥(文字獄)’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당했다.
이제 그는 공공연하게 재산을 긁어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뇌물을 받는 것은 물론이고 드러내놓고 횡령하거나 백주 대낮에 빼앗기도 하였다. 지방 관리들의 상납품은 화신의 손을 거쳐 황제에게 올라갔는데 그는 그중 진귀한 것들을 가로챘다.
그는 전국의 모든 상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굴복하게 만들었고,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멸문시켰다. 절강성(浙江省)의 부호 증씨(曾氏)는 화신에게 뇌물 바치기를 거부했다가 집에 강도가 들이닥쳐 하룻밤 사이에 모든 가족이 몰살당하고 전 재산이 강탈당했다. 겉으로는 강도를 당했다고 소문이 났지만 사실은 모두 화신의 손에 들어갔다.
淸의 10년 세수보다 많았던 재산
화신은 18세기 당시 세계 최고의 부자였다. 같은 시대 독일의 저명한 금융가 마이어 암셸 로스차일드(Mayer Amschel Rothschild)보다 재산이 더 많았다. 화신 스스로 대상인이기도 하였다. 수백 곳에 달하는 전당포와 오늘날의 은행 격인 은호(銀號)를 소유하였고, 영국의 동인도회사 및 청나라의 대외무역 독점 기관인 광동십삼행(廣東十三行)과 거래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륭제는 자기가 신임하는 화신의 부정을 파헤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러한 화신이 두려워서 고발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 한 번도 드러난 적이 없었다. 오히려 화신의 비위를 맞추느라 조정 안팎의 관리들은 백성들에게서 수탈해 온 진귀한 보물들을 앞을 다투어 그에게 갖다 바쳤다.
건륭제는 제위 60년 만에 태자 영염(永琰)에게 황제 자리를 양위했다. 바로 가경제(嘉慶帝)였다. 그러나 건륭은 비록 양위는 했지만 완전히 물러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화신을 가경제와 자신의 중간에 앉아 있도록 하고서 섭정하였다. 이 무렵 노쇠한 건륭제의 말소리는 매우 작고 더듬거려서 오직 화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였다. 이렇게 되니 모든 국정을 화신이 농단하게 되었고, 가경제는 그저 허수아비였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화신을 ‘이황제(二皇帝)’라 불렀다.
가경제도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마침내 건륭제가 세상을 떠나자 가경제는 즉시 20조항에 이르는 화신의 대죄를 선포하고 그의 집을 압수 수색하도록 명했다. 그의 집에서 백은 8억 냥을 압수했는데, 당시 청 왕조 1년 세수는 고작 7000만~8000만 냥에 지나지 않았다. 자그마치 청나라 조정의 10년 세 수입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화신의 재물은 모조리 국고로 옮겨졌다. 시중에서는 “화신이 거꾸러지니 가경(황제)의 배가 부르구나”라는 말이 널리 퍼졌다.
최강 제국의 붕괴 촉발시킨 부패
국법을 담당하는 정의(廷議)는 화신의 능지처참을 청했으나 화효 공주의 시아버지이고 선조(先朝)의 대신이었던 점을 감안하여 자진(自盡)할 수 있도록 윤허되었다. 마침내 흰 노끈이 보내지고 화신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들은 화효 공주의 남편이었기 때문에 면죄되었다.
건륭제가 세상을 떠난 뒤, 강력했던 청나라는 급속하게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 붕괴에는 화신의 엄청난 부패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최강의 제국을 기울게 만든 인물, 그는 바로 최고의 탐관(貪官) 화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