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기생충'이 제9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면서 덩달아 주목받는 곳이 있다. 크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BBC와 뉴욕타임스가 주목한 장소. 기택 식구들이 밀담을 나눈 피자집과 슈퍼마켓이 바로 그곳이다.
흔한 동네 피자집과 슈퍼마켓이지만, 영화 기생충의 성공으로 최근 전 국민이 관심을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해외 언론매체의 카메라 세례가 이어지고, 중국인 관광객까지 하나둘 찾는 것을 보면, 해외에서 유명세를 타는 것도 시간 문제인 듯하다.
겨울 끝자락 보슬비가 내리는 12일. 기자는 기생충의 주요 배경이 된 피자집과 슈퍼마켓을 찾았다. 기택 일가족이 시켰던 피자를 주문하고, 졸지에 동네 슈퍼스타가 된 가게 주인에게 영화 뒷 이야기를 물었다.
◇골목식당은 못 나왔지만…아카데미 수상작에 나온 '스카이피자'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는 작은 피자집에는 기택 가족이 반지하에서 접었던 피자박스가 마치 영화처럼 가득 쌓여있었다. 영화 속 상호였던 '피자시대'가 '스카이피자'로 바뀌어 있다는 것이 다른 점이랄까.
해외 동영상을 참조해 피자박스를 접었다가 호된 지적을 받았지만, 부잣집 아르바이트를 구한 뒤에는 기우(최우식 분)와 기정(박소담 분), 엄마 충숙(장혜진 분)이 피자를 당당하게 주문했던 곳. 최종 편집 때 피자를 먹는 장면은 삭제됐지만, 촬영 당시 이들이 먹었던 피자는 고구마피자와 감자피자란다.
2004년부터 이곳을 운영한 엄항기(65) 씨는 몰아닥치는 손님과 취재진을 상대하느라 바빴다. 귀찮을 법도 하지만 잇따른 취재진의 질문과 손님들의 주문에 화색이 만연했다. 최근 며칠 동안 기자들과 손님들이 많이 늘었다며 기생충과 관련한 뒷얘기를 들려줬다.
"바른손에서 직원이 나와 영화 촬영을 해보지 않겠냐고 물었어요. 흔쾌히 알았다고 했어요. 남편은 싫어했지만 제 뜻에 따랐죠. 이후에 직원과 감독, 스텝 20여 명이 가게를 찾아와 사전 답사를 2시간 동안 하더라고요. 실제 촬영은 6시간 정도였어요."
인터뷰에 따라온 인턴기자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박스는 누가 접어요? 영화처럼 동네 가정집에서 접나요?"
엄 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피자박스는 엄 씨 부부와 아들이 직접 접는다고. 하루에 몇 개나 접는지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영업기밀'이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 피자집은 지난해 '골목식당'에 출연 여부를 물었다고 한다. 엄 씨의 조카가 "맛도 좋고 가격도 싸니깐 백종원 대표의 지도를 받으면 좋겠다"라고 조언한 것.
"그런데 골목식당은 식당들이 죽 늘어선 상권이 있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우리 가게가 있는 집 근처에는 식당이 없어서 안 된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아쉬웠죠. 그런데 생각도 못 한 영화에 우리 가게가 나와서 참 기분이 좋아요."
엄 씨와 가족들이 유명세를 치르는 사이 단골손님들은 아쉬운 표정이 역력했다. 식탁 3개, 많아야 10명 정도가 들어가는 작은 피자집에 사람이 북적이게 되자, 단골손님들은 주문하기 어려워졌기 때문. 이날도 포장 구매를 하러 찾아왔던 몇몇 손님이 발걸음을 돌렸다. 엄 씨와 그의 아들은 연신 '죄송하다'고 말했다.
이날 만난 동작구청 한 직원이 기자에게 살짝 귀띔해줬다. "여기가 원래 동네만 아는 피자집이에요. 가게 안에서 먹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는데, 기생충 때문에 사람이 진짜 많아졌어요."
◇사건의 시작…민혁이 기우에게 영어과외를 제안한 그곳 '돼지쌀슈퍼'
피자집만큼, 영화 전개에 중요한 곳은 슈퍼마켓이다. 민혁(박서준 분)이 기우에게 영어 과외를 제안하는 곳이자, 기정이 문광(이정은 분)을 쫓아내기 위해 복숭아를 산 곳도 이 슈퍼마켓이다.
하지만 영화와 달리 파라솔은 없었다. 소주병을 맛깔나게 따던 탁자도 볼 수 없었다. 모두 촬영을 위해 차려놓은 것. 이 슈퍼마켓에서 35년간 장사한 부부 이정식(79) 씨와 김경순(74) 씨는 섭외와 촬영 당시에 대해 이렇게 기억했다.
"처음에 한 젊은 남자가 와서 촬영하고 싶다고 했어요. 우리 같이 늙은 사람들이 영화 촬영이 어떻게 되는지 아나. 사진만 몇 장 찍고 가는 줄 알았지. 그래서 알았다고 했는데 나중에 와서 앞에 물건을 다 치워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진열장도 뒤로 미루고. 조명도 자기네들 거를 가져왔어." (김경순 씨)
"저기 아이스크림 냉장고 있는 데 있잖아요. 저기가 탁자랑 파라솔 놓은 장소야. 원래 약간 경사진 곳이었는데 영화 촬영한다고 50만 원 주고 평평하게 공사를 했어요. 인부 두명을 불러가지고. 나중에는 여기 촬영한다고 검은 천으로 가게를 다 두르더라고." (이정식 씨)
만일 영화처럼 파라솔과 간이탁자가 그대로 있었다면, 아마도 인스타 최고의 핫플레이스가 되지 않았을까.
영화 촬영은 2주 가까이 진행됐다고 한다. 슈퍼마켓과 다른 장소를 오가면서 촬영한 탓이다. 2주간 '임시휴업'에 들어간 셈. 영화 제작사 측에서 일정 금액을 지급하면서 손해는 안 봤다며 활짝 웃었다. 동네 사람들만 아는 장소가 이젠 대부분 사람이 알게 된 '관광명소'가 됐다.
"손님들이 많아져서 장사에 도움이 되지 않나요?"라고 물었다. 사람이 많아졌으니, 매출도 늘어나는 건 당연할 것 같았다.
"구경하는 사람은 많아졌는데, 손님이 늘어난 건 아냐. 요즘에 필요한 물건을 다 인터넷으로 배달시키니까 여기까지 와서 물건을 안 사. 동네에 주차장이 없으니 젊은 사람은 거의 안 오고…. 부모 세대만 사는데 자식들이 집 앞으로 물건을 보내주더라고. 그렇긴 해도 사람이 많아져서 참 좋아요. 시끌벅적해진 느낌이라서 활기가 돌아." (이정식 씨)
◇봉준호 감독 수상 지켜본 그들…"가슴 뭉클해"
엄항기 씨와 이정식ㆍ김경순 씨 모두 영화 기생충과 봉준호 감독의 수상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두 가게는 '기생충에 나온 곳'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았다. 홍보를 떠나 영화가 잘 된 것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눈치였다.
"정말 뭉클했어요. 마지막에 상 받을 때는 눈물이 나더라고. 영화에 우리 피자집이 나온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상까지 받으니까 참 기분 좋았죠." (엄항기 씨)
"정말 감격스러웠어요. 장사는 잘 안됐는데 그래도 상 받으니까 좋더라고. 세계적인 상을 거머쥔 영화에 우리 가게가 나온 것이 자랑스러워. 봉준호 감독한테도 정말 고마워요. 이런 게 행복이 아닌가 싶어요." (이정식ㆍ김경순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