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이라고 불리는 이 명제가 떠오른 건 유동성 위기에 빠진 두산중공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을 바라보면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국내에선 다소 진정되고 있지만 경기는 급전직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경기의 ‘I’자형 추락을 경고하는 목소리도 나온다.(누니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
애초 정부는 중소기업과 소상공인 지원대책을 마련했다가 사태가 심각해지자 대기업에도 현금을 투입하겠다며 태도를 바꿨다.
대기업들이 자신들도 처참히 쓰러질 수 있다고 하소연했지만 한동안 정부는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처럼 ‘참’으로도 ‘거짓’으로도 분별하지 못했던 듯싶다. 이 정부는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고는 ‘색안경’을 끼고 대기업을 보는 경향이 있어 아마도 ‘죽겠다’라는 소리를 ‘정부 저리지원금을 빼먹기 위한 쇼’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
대형항공사가 인력 절반을 무급휴직으로 돌리자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 아니냐는 지청구도 나온다.
대기업 지원 출발점은 두산중공업에 대한 1조 원 대출이다. 국책은행인 한국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이 짐을 떠안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금융시장 경색 등으로 유동성 부족 상황에 직면한 두산중공업에 대해 계열주, 대주주(㈜두산) 등의 철저한 고통 분담과 책임이행, 자구노력을 전제로 산은과 수은이 긴급 운영자금 1조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그나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두산중공업은 최근 신한울 원전 3, 4호기 건설을 중단하는 탈(脫)원전 정책의 직격탄을 맞았다. 최소 2조5000억 원의 매출을 올릴 기회가 있었는데 정부정책에 기회박탈을 당한 것이다.
결구 수익성도 크게 악화했다. 작년 영업이익은 전년 대비 52.5% 줄어든 877억 원에 그쳤고, 4952억 원의 당기 순손실을 기록했다.
물론 탈원전 하나만으로 두산중공업의 위기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두산중공업이 10년간 1조7000억 원 규모로 지원한 자회사인 두산건설의 부실도 원인을 제공한 것 역시 사실이다.
작년 말 기준 두산중공업의 차입금은 4조9000억 원에 달한다. 자회사가 진 빚을 포함하면 5조9000억 원 규모다. 특히 이 가운데 올해 내에 갚아야 할 회사채만 1조2000억 원에 달한다.
하지만 여기서 ‘에피메니데스의 역설’을 도출해 볼 수 있다.
정부는 두산중공업을 죽인 것일까, 살린 것일까
이번 대출 약정은 두산중공업의 산소호흡기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탈원전 정책으로 이 회사를 낭떠러지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도대체 어떤 판단을 내려야 하는지 딜레마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치적 중 하나로 기록될 가능성이 큰, 글로벌 모범사례라는 코로나19 방역 및 대처법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정부는 코로나19사태 초기, 중국발 입국자를 막아야 한다는 의료전문가집단의 조언을 따르지 않았고 국경을 사실상 활짝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조만간 종식’이라는 섣부른 언급으로 방역시스템에 틈을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대구 신천지 신도를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감염 확진자는 한때 세계 2위까지 오르는 부끄러운 기록을 세웠다.
이후 전 국민들의 협조와 의료봉사자들의 헌신 등으로 그나마 체면치레를 했는데, 정부는 틈만 나면 “세계 각국이 한국 배우기에 여념이 없다”라는 홍보에 바쁘다. 속되게 표현하자면 ‘자뻑(자기가 잘났다고 믿거나 스스로에게 반하는 일)’에 푹 빠져있다.
문재인 정부의 이 같은 행보를 재단해 볼 수 있는 판례가 있다.
2017년 1월 울산에서는 음주운전 사고를 낸 뒤 달아났던 운전자가 4분 만에 다시 사고 현장으로 되돌아와 구호 조치를 했다. 피해자는 전치 10주 진단을 받았다. 다행히도 사고를 낸 운전자가 돌아왔기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울산지법은 이 운전자에게 음주운전과 도주치상죄 등을 물어 징역 1년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