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크로스컬처 대표
요즘 재난지원금을 둘러싸고 여러 논란이 오간다. 논란을 가만히 보자니 영화 ‘나 , 다니엘 블레이크’가 떠오른다. 영국 뉴캐슬에 살고 있는 다니엘 블레이크. 오랜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그리며 혼자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다. 자신도 오랜 지병인 심장병을 앓고 있고 지금은 의사의 권고로 일을 잠시 쉬고 있다. 생계는 해야겠기에 우리나라의 고용지원센터 같은 곳을 찾아가 자신의 상황을 담담히 얘기한다. 그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주눅들지 않고 당당하다. 그러나 이런 젠장할….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르는 다니엘에게 공무원은 복잡한 실업구제 신청을 사무적으로 알려준다. 수십 번 업로드에 실패한 그는 옆집 흑인 젊은이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성공하나 돌아오는 답은 신청자격이 없다는 냉랭한 전화 음성뿐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이른바 관료주의와 형식적 복지의 사각지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복지 시스템의 허술함만을 얘기하진 않는다. 오히려 그보다 상위개념인 ‘인간의 존엄’과 ‘마지막 지키고 싶은 자존감’에 대한 성찰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다니엘 브레이크
부자는 단 하나의 이유로 부자가 되지만, 가난은 여러 사연으로 사람들을 가난에 몰리게 한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은 실업과 생활고 해결이 국가의 큰 일 중 하나이며, 실업난 해소는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최고의 이슈이자 난제다. 사람은 일할 때 인간의 존엄이 지켜진다고 하지 않던가. 다니엘 블레이크의 장례식에서 케이티가 생전에 그가 남긴 글을 읽는 장면이 가슴을 후비고 들어온다.
“나는 의뢰인도, 고객도, 사용자도 아닙니다. 나는 보험번호 숫자도, 화면 속 점도 아닙니다. 난 묵묵히 책임을 다해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 개가 아니라 인간입니다. 이에 나는 내 권리를 요구합니다. 인간적 존중을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