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리스 원유’ 급증에 치솟는 유조선 ‘몸값’ 10년래 최고
글로벌 원유의 공급 과잉에 국제유가가 마이너스권에 진입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원유시장은 혼돈에 빠졌다. 이 가운데 유조선업계가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다.
23일(현지시간)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유조선의 ‘몸값’이 치솟고 있다. 3월 이후 원유 저장을 위한 유조선 수요가 급증하면서 2월 하루 2만5000달러에 불과하던 용선료가 거의 20만 달러로 10배 이상 폭등했다. 최고 30만 달러도 부른다. 소위 부르는 게 값이다. 이는 택시처럼 고객과의 협상을 통해 요금이 매일 변하는 선박의 특성 때문이다. 정유업계는 앞다퉈 세계 최대 유조선 회사 유로나브의 축구장 3배 이상 크기의 대형 유조선을 하루 15만 달러에서 최대 20만 달러를 주고 전세를 내고 있다.
평균 25명의 승무원 임금 및 식비 등으로 선박 운영에 보통 하루 약 1만8000달러가 든다는 점을 고려하면 엄청난 수익을 챙기고 있는 셈이다.
유로나브 최고경영자(CEO) 후고 디 스툽은 “이 어려운 시기에 돈을 버는 몇 안 되는 분야 중 하나”라면서 “현재 선박 시장은 완전히 딴 세상”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유조선업계가 거의 10년 만에 최고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유조선 업계의 때아닌 호황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따른 전 세계 이동 제한으로 글로벌 원유 수요의 3분의 1이 증발하면서 시작됐다. 설상가상,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치킨게임을 벌이며 원유 공급을 늘리자 갈 곳 잃은 원유들이 넘쳐났다. 이에 육상과 해상을 막론하고 원유를 저장할 공간이 턱없이 부족한 사태가 펼쳐졌다.
알렉산더 부스 케이플러 시장 분석 책임자는 아랍에미리트연합의 푸자이라나 캘리포니아 롱비치의 셰브론 정유소에 저장되는 기름의 양이 4월 초 이후 40% 증가해 1억5800만 배럴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같은 기간 바다 위 유조선에도 원유가 1억 배럴 증가해 12억 배럴로 차올랐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 유조선의 최대 15%가 저장에 사용되고 있다고 추산했다.
게다가 원유 트레이더들이 추후 유가가 상승할 것에 베팅을 하는 것도 유조선 수요를 끌어올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북해산 브렌트유가 20달러 선을 밑도는 지금 말고, 더 좋은 가격에 팔기 위해 유조선을 전세 내 원유를 쌓아두고 있는 것이다.
유조선 업계는 올해 들어서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올해 초 하루 12만 달러이던 용선료는 2월 들어 세계 최대 원유 수입국인 중국 경제가 코로나19로 멈춰서면서 2만5000달러로 수직 낙하했다. 그러다가 3월 초 사우디와 러시아가 가격 전쟁을 벌이면서 다시 웃게 됐다. 공급 과잉 사태에 사우디가 18척의 유조선을 전세 내는 등 수요가 급증하면서 요금도 20만 달러까지 치솟았다.
기쁨은 오래갈 수 있을까. 세계 경제가 정상화하고 원유 수요가 늘어 해상과 육상에 쌓인 석유 재고가 청산되기 시작하면 저장 공간으로서의 유조선을 찾는 수요는 줄어들 수 밖에 없다. 부스는 “유조선 업계도 언젠가 ‘숙취’를 겪을 날이 올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