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기다. 이럴 때 둥둥 떠 있기만 할 게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확산이 우리 사회의 모든 것을 바꾸고 있는 가운데 특히 제약바이오업계는 변화의 흐름에 이끌려 가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흐름을 이끌고 간다는 점에서 다른 산업과 차이가 있다. 신약 개발이라는 기술력으로 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지난 1일 이투데이와 만난 원희목 한국제약바이오협회장은 국내 제약바이오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코로나19는 그런 판을 마련하고 있는 업계와 원 회장에게 찾아온 위기인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포스트코로나에 '제약 자국화' 재조명…민관 협력체계 구축해야 = 국내외 전문가들은 앞으로 제2, 제3의 코로나19가 빈번하게 발생할 것이란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언제라도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수 있도록 장기적인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어느 때보다 연구·개발(R&D) 역량을 강화해야 할 시기다.
원 회장은 "그간 업계의 글로벌 제약바이오강국 도약 목표가 유망 성장산업으로서 경제적 가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코로나19로 확산한 감염병에 대한 우려는 백신 및 치료제 개발과 필수의약품 공급 등 '제약 자국화'의 필요성을 재조명하는 계기가 됐다"고 진단했다.
그는 자급률을 안정적으로 확대하기 위해 정부가 원료의약품 개발 원가를 고려한 약가 등 지원시스템을 마련하고, 제약바이오 부문 원부자재 R&D 시설 및 생산시설 구축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 회장은 "그동안 글로벌 신약 개발이란 큰 산을 앞에 놓고 있던 제약업계는 이제 코로나19란 산을 만났다"면서 "업계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다른 유통·제조업 등과 달리 국민건강을 수호하는 보건안보의 핵심 산업이란 가치를 가져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감염병 치료제·백신 개발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신종 감염병 백신 개발에 앞으로 10년 동안 총 2151억 원을 투자하고, 시장에서 경제성이 없더라도 정부가 충분한 양을 구매해 개발에 들인 노력과 비용을 100% 보상받도록 하겠다는 언급도 했다.
원 회장은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위급한 시기에 이 같은 정책적 판단은 감염병 백신·치료제 개발에 대한 현장의 애로사항을 해소하는 조치로 환영할만 하다"며 "코로나19 위협에 놀라 일시적으로 시행하는 미봉책에 그치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업계의 코로나19 여파는 지표상 2분기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반기에는 피해가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올해 초 실거래가 약가인하와 7월 시행하는 제네릭 약가차등제에 따른 기등재 의약품 약가인하 등 중복된 약가인하는 업계에 어려움을 더한다. 기존에 등재된 약도 재평가해 급여 삭제 혹은 약가를 낮추는 사후약가인하도 예고됐다.
원 회장은 "코로나19로 가뜩이나 어려운데 정부의 중복적인 약가규제가 예정돼 있다는 점은 심각한 사안"이라며 "치료제와 백신 개발을 위한 R&D가 시급한 지금 추가적인 약가인하는 R&D 동력 상실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뭉쳐야 산다'…오픈 이노베이션 컨소시엄 출발 = 원 회장은 올해 협회의 목표로 '오픈 이노베이션'을 강조했다. 글로벌 제약바이오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산학연병 등 민간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하는 개방형 혁신 생태계를 구축하자는 것이다.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이 최근 빠른 속도로 발전을 이뤘지만, 글로벌 시장에 비하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 글로벌 1위 제약사 화이자의 매출액은 50조 원이 넘는다. 반면 국내 1위 제약사의 연 매출은 1조5000억 원 정도이며 국내 시장 전체 규모도 약 20조 원에 그친다. 일본은 다케다를 비롯해 글로벌 50대 제약사에 10곳이나 이름을 올렸지만, 한국은 한 곳도 없다.
규모의 차이는 R&D 투자의 차이로 이어진다. 2018년 기준 화이자는 9조 원, 노바티스는 10조 원, 로슈는 12조 원을 R&D에 쏟아부었다. 글로벌 공룡들의 틈바구니에서 우리나라의 존재는 미미할 수밖에 없다.
원 회장은 "국내 제약바이오산업은 아직 글로벌 시장에서 매출 규모나 혁신신약 개발 성과가 뒤처진다"면서 "그러나 기술수출 등의 사례를 보면 상당한 잠재력이 있다. 모여서 힘을 합치고 자본을 키우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협회는 감염병 확산 등에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치료제와 백신, 고비용·저수익 필수의약품의 안정적인 개발을 지원하는 '한국혁신의약품컨소시엄(가칭)'을 설립한다. 컨소시엄은 감염병 치료제 등의 공동 연구개발 플랫폼 구축은 물론, 오픈 이노베이션에 기반을 둔 혁신 신약 개발과 해외 진출 등 고부가가치 창출 기회를 모색하겠다는 취지를 담았다.
원 회장은 "이미 세계 제약시장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주축으로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 빅파마의 파이프라인이나 라이브러리를 개방하고, 관심 있는 이들을 모으고 있다"며 "모든 것을 영업비밀처럼 쥐고 있던 시대는 끝났다"고 설명했다.
국내 제약바이오업계가 공동 출자·개발을 뼈대로 하는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픈 이노베이션이 중요성이 커지고 있지만, 업계 전반적으로 여전히 폐쇄성이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원 회장은 협회의 모든 회원사가 참여하고, 함께 출자하는 형태의 이번 컨소시엄을 구상했다. 1차연도인 올해는 13개사 이사장단사가 2억 원씩 의무적으로 출자하고, 34개 이사사에는 1억 원 출자를 권장한다. 여기에 협회 재원을 충당해 70억 원의 현금을 마련할 계획이다.
◇제약산업은 국민산업…글로벌 신약 탄생할 것 = 우리 제약바이오산업은 최근 몇 년 사이 괄목할 만한 성장과 성과를 동시에 이뤘다. 그러나 과거 리베이트 관행이나 복제약(제네릭) 난립, 일부 기업의 신뢰성 훼손 등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국민의 기대치가 낮고 평가가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원 회장은 산업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성공사례가 최우선이라고 진단했다. 내수 중심에 머무르던 업계가 적극적인 오픈 이노베이션과 과감한 R&D 투자를 통해 역량을 높이고, 해외 진출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신약은 0.01%의 가능성을 놓고 수많은 시도가 이어지는 것"이라며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어 "국내 신약개발의 역사가 20년 정도라고 하지만 실제로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10년 안팎에 불과하다"며 "실패가 축적돼서 제대로 된 성공사례가 나오면 글로벌 시장 판도는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고 덧붙였다.
국내 전통 제약사들은 오랫동안 도전 대신 순응에 익숙했으나, 2015년 한미약품이 글로벌 제약사를 상대로 초대형 기술수출에 성공하면서 순식간에 전환점을 맞았다. 비록 일부는 반환됐지만, 그 후 수많은 도전의 시발점이 됐다.
원 회장은 오픈 이노베이션을 통한 신약 개발을 최근 가장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는 회사로 유한양행을 꼽았다. 유한양행은 '레이저티닙' 등 대규모 기술수출 성과를 연달아 내면서 순식간에 R&D 중심 제약사로 탈바꿈했다.
그는 "우리가 기술수출이란 경험이 희박할 때 선도자 역할을 한미약품이 해냈고 그 후로 많은 회사가 도전하고 성과를 냈다"면서 "유한양행이 역량을 최대한 집결해서 투자하고 있고, 한미약품도 시행착오 끝에 공을 위한 밑거름이 되면서 조만간에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더욱 활발한 신약 개발 R&D를 위한 정부의 역할도 주문했다. 연간 업계에 투자되는 정부의 R&D 지원 자금은 3000억 원 수준에 불과하다. 원 회장은 "연구 단계부터 시장에 나올 수 있는 활용성을 고려해야 효율적"이라며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닌 산업화 연계 프로젝트 방식의 집중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