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환자 옆에 환자, 그 옆에 또 환자

입력 2020-08-04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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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환 정치경제부 부장

재계 서열 10위안에 드는 대기업 임원인 아내가 어느 날 남편에게 하소연했다. “동창회에 들고 갈 가방이 마땅치 않네요. 이참에 명품백 하나 장만해야겠어요”

학창시절 민주화 운동에 투신한 뒤 감옥살이까지 했던 남편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집에 가방이 몇 개는 되는 것 같은데 무슨 명품백을 또 사? 에코백 하나 사다 줄 테니 그거 메고 다녀”

억대 연봉 임원이 될 때까지 수십 년을 아끼고 줄이며 열심히 살았던 아내는 답답했다. “동창회에 에코백을 들고 가는 사람이 어딨어요. 우리도 이제 먹고살 만하니 좋은 것 좀 누리고 살아요 여보”

남편은 혀를 차며 타박했다. “에코백이 어때서 그래? 품질 좋지, 저렴하지, 게다가 환경보호까지 되잖아? 요즘은 그런 가방을 메는 사람이 깨어있는 시민인 거야”

아내는 속물 취급을 당한 것 같아 결국 기분이 상했다. “누가 사 달래요? 내 돈으로 내 가방 알아서 산다고요. 백 개를 사던 천 개를 사던 내 맘이에요. 사줄 능력도 없으면서 간섭은….”

아내의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한 남편이 역정을 내면서 예정된 수순이 시작됐다. “돈 잘 번다고 유세하는 거야? 당신이 누구 덕에 대기업 임원이 된 줄 알아? 다 페미니스트 지지하는 나 같은 사람이 있어서야! 나 없었으면 여자들은 지금도 부엌데기 신세라고”

꾹꾹 눌러 참던 아내도 마침내 폭발했다. “당신이 이 만큼 사는 건 누구 덕인데요? 없는 집에 시집와서 뼈가 부서져라 일 해서 벌어먹일 동안 뭘 했다고 사라 마라에요? 당신 덕인 건 우리 딸 학교에서 선생한테 성추행 당했을 때 당신이 그 선생 친구라고 입 다무는 바람에 꽃뱀 여고생으로 몰린 게 페미니스트인 당신 덕이겠죠!”

남편은 이쯤에서 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 이 여편네가. 에잇! 천박한 동창회 같으니라고”

아내가 허영에 찬 것으로 보일 수도, 남편이 눈치가 없어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둘 다 일수도.

사실 부부는 감수성 결핍증후군이라는 질병을 함께 앓고 있다. 불치병임에도 아직 치료제나 백신 개발에 나서는 이 조차 없는 것은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됐기 때문이다. 심리학자들은 감수성 결핍이 아니라 사회적 지능이 낮은 ‘감성지능 발달장애’라 불러야 한다고 지적하지만, 덜떨어진 인간임을 인정하기 싫기 때문인지 받아들이는 이가 드물다.

감정으로 치부돼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보니 감성지능 발달장애 환자들의 병세는 날로 악화돼간다. 더구나 최근에는 꼰대 말기증상과 합병증을 일으켜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고 있다. 감성지능 발달장애와 꼰대 말기가 겹치면 산업화 꼴통이나 민주화 꼴통 같은 환각증세를 일으킨다고 한다.

산업화 꼴통은 “니들이 잘살게 된 건 다 내 덕”이라며 자신이 곧 국가라 여긴다. 이 나라를 나 혼자 지켜냈으며, 나만 일으켜 세웠고, 노력만이 4차산업혁명을 이끌 경쟁력이라 믿는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으니 상명하복 확실히 지키면서 인권 따위 아몰랑 착즙이 곧 애국이다. 개돼지 아랫것들과 낙오자는 삼청교육으로 정의사회를 구현한다.

민주화 꼴통은 “니들이 자유롭게 사는 건 다 내 덕”이라며 국가가 자기 것이라 착각한다. 이 나라를 나혼자 해방시켰으며, 나만 깨어있는 시민이고, 정신승리만이 4차산업혁명을 이끌 생존법이라 믿는다. 네 탓 하면 살고 사과하면 죽으니 니 편 내 편 확실히 갈라치고 논리 따위 아몰랑 선동이 곧 애국이다. 가붕개(가재·붕어·개구리) 천한 것들과 배신자는 죽창으로 참교육한다.

다른 듯 닮은 두 질환은 원래 한배에서 나오다 보니 공통된 증상이 하나 있는데, 하루에도 몇 번씩 라떼에 목말라하는 점이라고 한다. 라떼 원샷 드링킹 하고 나면 “말이야”로 시작해 혼잣말을 한참이나 늘어놓은 뒤에야 증세가 가라앉는다고 불치병 권위자들은 전한다. 청력은 멀쩡한데 남의 말은 들리지 않고, 눈으로 보면서도 아무도 내 말을 듣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며, 싫다는데 자꾸 더듬고 만지는 수전증도 똑같다고 글로벌 의학계는 입을 모은다.

환자조차 제 입으로 천박하다는 한국판 고담시티에는 환자 옆에 환자 그 옆에 또 환자가 넘쳐나니 오늘도 정상인의 하루를 보내기는 글렀다. 판단능력이 불완전한 사람은 안타깝지만 불가피하게 일상생활에 일정 수준의 제약을 두는데, 감성지능 장애가 있어도 국회의원이 되고 장관도 되고, 더 높은 자리에도 앉으니 이젠 혹시 내가 환자인가 의심들 지경이다. 모든 나라는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는 처칠의 말은 거짓부렁임을 누가 좀 증명해 줬으면 좋겠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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