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리그 오브 레전드(LoL) 한국 리그 LCK(LoL Champions Korea)가 체면을 구겼다. 미성년자 프로게이머 카나비(본명 서진혁) 선수에게 구단이 불공정계약을 강제했다는 논란이 불거져서다.
이에 LoL 운영사 라이엇 게임즈는 지난 5월 ‘e스포츠 프로 선수 계약서’를 발표했고, 문화체육관광부도 7월 ‘이스포츠 선수 표준계약서’를 행정 예고했다.
그럼에도 프로게이머를 보호하겠다는 명분으로 발표된 두 표준계약서가 아직도 이들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 선수에게 지원하는 ‘후원금’이란 = 두 표준계약서에는 ‘후원금’이라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선수활동의 대가다. 게임단은 각종 e스포츠 대회와 훈련, 부대활동에 참가하는 선수에게 임금이 아닌 ‘후원금’을 지급한다. 이외에도 대회 상금이나 영리활동으로 인한 수익을 사전에 결정된 비율에 따라 분배한다. 임금의 성격을 띠지만 임금으로 규정돼있지 않아 사각에 놓여있는 프로게이머들이 생겨나고 있다.
문제는 ‘후원금’이라는 표현이다.
이에 대해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임금이나 보수, 이런 개념을 사용하기보다 후원금이라는 개념을 사용해 프로게이머의 노동자성에 포섭되지 않으려는 흔적이 보인다”고 평가했다.
프로게이머들은 최저임금 적용을 받을 수 없고, 구단과 직접 협상해 후원금을 산정해야 한다.
선수 개인의 협상력이 요구되는 구조다.
프로게이머 평균 연령이 21.2세, 육성군 선수는 17.4세인 만큼 압도적인 인기나 실력을 지니고 있지 않은 이상 구단을 상대로 협상력을 발휘하기 어렵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9년 진행한 ‘이스포츠 실태조사’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2018년 기준 선수들의 연봉에 관한 설문에 2000만 원 미만이라는 응답이 35%로 가장 많았다. 응답을 거절한 선수도 26%에 달했다. 2000만 원~5000만 원 사이가 18%, 5000만 원~1억 원이 13%로 나타났다. 상대적으로 비인기 리그로 분류되는 배틀그라운드 프로게이머의 경우에도 연봉 2000만 원 미만의 비율이 50%, 오버워치 프로게이머는 48.1%였다.
이어 전문가들은 선수들이 주중 11시간, 주말 11.4시간 동안 연습을 진행하고 있지만 고정된 휴식일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라이엇 게임즈와 문체부에서 발표한 표준계약서에는 이와 같은 문제를 시정하기 위한 문구가 없었다.
선수들의 최저 생활 수준을 맞춰야 한다는 내용이나 훈련 시간, 휴식 시간 등을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 또한 없었다. 선수들의 권익 보호보다 구단에 유리한 후원금의 감액 조건을 비롯해 초상권‧상표 표명권에 대한 내용이 훨씬 자세했다. 불공정계약에 피해를 입은 선수가 등장할 수 있는 배경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 프로게이머의 ‘노동자성’? = 표준계약서를 발표한 라이엇게임즈와 문화체육관광부는 ‘후원금’이라는 표현을 쓴 데 대해 프로게이머의 특수성이 감안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통상 근로기준법상 적용되는 근로계약 관계와 성격이 다르다”며 “보통 선수생활은 전속계약의 성격이 있어 후원금 계약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라이엇 게임즈 관계자도 “오히려 근로계약을 원하지 않는 선수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근로계약을 맺으면 회사 내규에 따라 상여금이나 연봉이 책정되는데, 각자 성과에 따라 보상받는 개인사업자의 형태가 프로게이머들에게 보다 적합하다는 것이다.
조은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프로게이머 선수들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로 인정이 되지 않는 것은 맞다”며 “다만 연극‧뮤지컬 배우 중 연습생이나 단역 배우들의 경우 근로자성이 있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대중적 유명세와 영향력이 없는 경우 회사 지시에 구속돼, 근로자성을 인정받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스포츠팀의 사례를 들어 반박하는 의견도 있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스포츠팀이 운영하는 공공기관이나 시도체육회 다수는 선수와 계약 체결시 ‘근로계약서’나 ‘고용계약서’를 작성한다”며 “이외에도 운동선수들은 4대보험을 비롯해 퇴직금을 보장하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스포츠 업계의 ‘샐러리캡’처럼 저연차‧저연봉 프로게이머를 보호할 방안 없이 표준계약서를 도입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 국내 스포츠 리그에서는 인기 선수에게 연봉이 쏠리는 현상을 방지하고 사각에 놓인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해 샐러리캡을 도입하고 있다.
이처럼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조항을 보완하지 않고 표준계약서를 도입하는 것이 미진한 대책이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 e스포츠 산업과 프로게이머의 보호를 위해 = 문화체육관광부가 매년 발간하는 ‘게임백서’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이스포츠 실태조사’에서도 꾸준히 선수들의 처우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한국의 뛰어난 프로게이머들이 중국, 북미 리그 등으로 유출되는 만큼 선수들의 처우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2015 게임백서’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국내 LoL 선수들의 평균 연봉이 3000만 원 전후였던 데 비해 중국에서는 세금을 제외하고 1억 원이 넘는 액수를 제안하여 우수 선수들을 유치하고 있었다.
류호정 정의당 의원은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더라도 자신을 갉아먹으면서까지 해서는 안된다”면서도 "구조적으로 개개인이 문제해결을 위해 나서기는 어려운 상황이다"라고 덧붙였다. 더불어 기존 스포츠계는 오랜 세월을 쌓아오며 선수들의 불공정계약 문제를 폭로하고 노조‧선수협회 조직을 시도하는 등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투쟁을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류 의원은 “e스포츠에는 그런 큰 움직임이 아직까지 없다”며 “프로게이머에게만 맡길 게 아니라 게이머들의 지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