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
범행 당시를 설명하는 가정을 올바로 세우면 범인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반대로 사건 정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면 오히려 범인이 만들어놓은 함정에 빠져 사건은 미궁에 빠지기 마련인데 이를 보완하는 것이 과학수사이다.
유교를 국시로 삼은 조선시대라고 해서 범죄가 생기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유럽에서는 아서 이그나티우스 코난 도일(Arthur Ignatitus Conan Doyle, 1859∼1930)이 창안한 셜록 홈즈가 등장하기 전까지 과학적인 수사 기법이 사용되지 않았지만 조선은 이보다 훨씬 빠른 건국 초기부터 과학수사가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높은 시청률을 보인 미국 TV 드라마 ‘CSI, 과학수사대’에는 사건 현장에서 혈흔을 찾아내기 위해 분무기로 무언가를 뿌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현대 수사에서 혈흔 확보의 공식처럼 돼 있는 이 장면에 등장하는 용액은 질소화합물인 루미놀(Luminol)과 과산화수소수의 혼합액이다. 혈흔을 찾고자 하는 곳에 이 혼합액을 뿌리면 과산화수소수가 혈흔에 남아 있는 헤민(Hemin)이라는 성분과 작용해 강렬한 화학 발광(發光)을 한다. 어두운 사건 현장에서 이 용액을 뿌리면 청백색의 형광이 나타나 핏자국을 쉽게 판별할 수 있다. 물론 때때로 혈흔 이외의 물체에서도 발광하는 경우가 있어서 추가 검증이 필요하지만 조작이 간편하고 반응이 확실하다는 점 때문에 교통사고 등 범위가 넓은 사건 현장에서 필수적으로 사용된다.
조선시대에 루미놀은 없었지만 이에 못지않은 혈흔 찾는 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알면 놀랄 것이다. 범인을 찾을 때 가장 어려운 것은 범인이 살해도구를 은익하거나 훼손하는 경우이다. 그런데 조선의 수사록에 시간이 많이 지나 살인한 흉기를 판별하기 어려우면 숯불로 빨갛게 달구어 고초로 씻으면 피의 흔적이 보인다고 적었다.
KBS ‘역사스페셜’ 팀은 ‘조선 CSI 누가 황씨 부인을 죽였나’에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이강봉 박사팀과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검증했다. 이 박사는 수사록에 적혀 있는 고초액 즉 초산만 사용하여 일주일 동안이나 계속 실험했음에도 혈액 흔적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수많은 실험을 거쳐 고초액에 티오시안나트륨을 혼합시켰더니 철과 반응하여 혈액 흔적이 나타남을 확인했다. 조선시대 수사록에는 단순하게 고초액이라고만 적었지만 이 당시 수사관들이 수많은 실험을 거쳐 고초액에 철과 반응하는 성분을 넣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루미놀이 없던 조선시대에 그런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간단히 말해 당대의 수사진에 과학적 사고로 수사에 임한 전문가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상흔을 변질시키지는 않았다 해도 사체가 외부에 노출되어 시일이 오래 경과되면 시체의 얼룩인 시반(屍斑)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법물(法物)을 사용한 과학수사가 더욱 빛을 발한다. 법물이란 검시에 활용되는 보조도구 및 수단들로, 널리 알려진 것은 100% 순도의 은비녀이다. 그밖에 술지게미(糟), 초(醋), 파, 소금, 매실과육은 물론 창출(蒼朮, 당삽주의 뿌리) 조각 등의 약재도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독사(毒死)의 경우 전적으로 은비녀에 의지했는데 이는 조선 특유의 수사기법으로 볼 수 있다. 중국에서는 비상(砒霜)으로 인명을 해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상으로 살해되는 경우가 많았다. 비상은 예로부터 죄인에게 내린 사약에 많이 쓰인 독극물로, 무색무취의 백색 분말로 물에 잘 녹는데 자연 상태의 비소(砒素)를 원료로 제조된다. 지구상의 원소 중 50번째로 많은 비소는 인류가 오래전부터 사용해 온 물질로, 자연 상태의 비소는 독이 없으나 여러 가지 비소산화물 중 아비산(As2O3)이 가장 강력한 독성을 발휘한다. 이것이 비상인데 은이 비상의 황과 결합하면 검게 변한다. 이러한 색의 변화로 비상이 독살에 사용됐는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 조사관 및 검시관은 아전을 대동하고 조사를 벌인다. 시체가 놓인 장소에 도착하면 우선 시체를 중심으로 사방 규격과 시체가 놓인 방향 등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집중적으로 관찰한다. 사건 장소에 대한 조사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시체를 살핀다. 먼저 겉으로 드러난 안색이나 상흔 등에 주목하면서 옷을 벗기고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하였는데, 이 기록은 당시의 복장 형태를 알 수 있을 정도로 매우 자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최종적으로 알몸이 된 시신의 상태를 기록한 것이 시장(屍帳)으로 검안 기록에 덧붙이거나 별도로 묶어서 보고했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수사관들은 단지 죽음을 분류하고 그 원인을 알아내는 소극적인 방법에 그친 것이 아니라 과학적으로 살해의 증거를 통해 수사를 진행한 것이다. 강도가 뒤쫓아 와도 뛰지 않는다는 조선시대에 범인의 검거율이 90% 이상 됐다는 것은 이런 과학수사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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