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났다] 태국 출신 난민 1호 차녹난 루암삽 “태국의 가장 큰 문제는 왕실…군주제 개혁 필요”

입력 2020-10-23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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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에서 ‘왕실모독죄’의 혐의로 기소돼 망명한 차녹난 루암삽은 2018년 11월 5일 비로소 난민 지위를 얻었다. (차녹난 루암삽 제공)

2018년 1월 16일 오후 2시, 태국에 있던 청년활동가 차녹난 루암삽(27)은 한 통의 경찰 출석요구서를 받았다. 당시 많은 시위를 주도했던 그는 이미 여러 번 출석서를 받아왔기에 그저 여느 때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왕실모독죄’와 관련한 내용이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고민할 겨를도 없이 나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감옥에 가면 세상을 다시 볼 수 없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차녹난 루암삽은 태국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난민 지위를 취득한 사람이다. 태국에서 ‘왕실모독죄’의 혐의로 기소돼 망명한 그는 2018년 11월 5일 난민 지위를 얻었다. 태국 명문 쭐라롱꼰왕립대학 정치학과 11학번인 차녹난은 2014년 5월 군부가 쿠데타로 집권한 이래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단체를 설립하고 운동을 이끌어왔다.

최근 태국의 민주화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상황에 대해 태국에서 망명한 차녹난의 생각은 어떨까. 이투데이는 20일 오후 서울 중구의 한 카페에서 차녹난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차녹난이 ‘왕실모독죄’로 기소된 이유는 2016년 왕실을 비판하는 BBC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해서다. (윤상호 인턴 shark9694@)

SNS에 기사 공유했다는 이유로 왕실모독죄 기소돼 망명 결정

차녹난이 ‘왕실모독죄’로 기소된 이유는 2016년 왕실을 비판하는 BBC 기사를 페이스북에 공유해서다. 이미 군부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왔던 그는 시위법 위반으로 여러 번 경찰에 체포됐었다. 첫 시위를 시작한 지 3년여 동안 정부는 군인들을 집으로 보냈고 심지어 부모님을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와 동료들은 정부를 비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이에 정부는 그를 굴복시키기 위해 시위법이 아닌 더욱 강력한 카드를 꺼냈다. 바로 ‘왕실모독죄’다.

‘왕실모독죄’라 불리는 태국 형법 112조는 왕과 왕비, 왕세자와 섭정자 등 왕실 구성원은 물론 왕가의 업적을 모독하는 경우 최고 15년의 징역형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차녹난은 “왕실모독죄는 왕실을 비판하는 모든 사람이 대상이 될 수 있다”며 “왕실의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2014년 군부가 들어선 이후 왕실모독죄로 기소된 사람들이 많아졌고, 심지어 부모·형제 등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신고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왕실을 비판하는 게시물을 공유할 당시, 차녹난은 태국이 아닌 브라질에 있어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지만 같은 게시물을 공유한 그의 친구 자뚜팟 분빠타라락사는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왕실모독죄 위반의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고, 이후 감형돼 2년 반만인 2019년에 출소했다.

당시 브라질에 있던 차녹난은 군인들이 태국에 있는 어머니를 위협했음에도 게시물을 삭제하지 않았다. 이후 태국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시위에 참여하던 그는 1년 전 사건으로 ‘왕실모독죄’에 기소됐다. 감옥에 갇혀 오랫동안 나오지 못할 것을 우려한 차녹난은 결국 한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한다.

태국의 가장 큰 문제는 ‘군주제’…왕실이 법 위에 존재

차녹난에게 현재 태국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그는 바로 ‘군주제’라고 답했다. 태국은 ‘국왕’이 있는 입헌 군주제 국가다. 2016년 왕위를 계승한 국왕 마하 와찌랄롱꼰(라마 10세)은 수차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는 복잡한 사생활과 잦은 해외 체류 등으로 국민의 불만을 사고 있지만 ‘왕실 모독죄’를 통해 군주제에 대한 모든 비판을 차단하고 있다.

차녹난은 “군주제가 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상황의 원인”이라며 “만약 왕실이 쿠데타를 승인하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왕실에서 쁘라윳 총리를 꼭두각시로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차녹난은 “태국에서 왕실은 총리나 군부보다도 훨씬 강력하다. 왕실이 법체계 위에 존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왕이 곧 법이다(The king can do no wrong)’라는 표현을 언급하면서 “태국의 국왕은 잘못된 일을 저질렀더라도 누구도 그를 고소할 수 없고 법정에 가지도 않는다. 왕실은 법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강조했다.

▲군부 독재에 대해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차녹난과 동료들은 영화에서 나온 ‘세 손가락 경례’를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차녹난 루암삽 제공)

세 손가락 경례, 2014년 동료들과 함께 고안…여러 번 체포되기도

‘세 손가락 경례’는 태국 민주화운동 시위대의 상징이다. 독재에 대한 저항을 뜻하는 세 손가락 경례는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내용을 담은 영화 ‘헝거 게임’에서 따왔다.

차녹난과 그의 동료들은 2014년 ‘세 손가락 경례’를 고안해 선보였다. 2014년은 태국에 영화 ‘헝거 게임: 모킹제이’가 개봉한 해로 현 총리인 쁘라윳 짠오차의 지휘 아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현재 시위대가 퇴진을 요구하고 있는 쁘라윳 짠오차 총리는 장군 출신으로, 2014년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뒤 헌법을 개정해 군부 독재의 시대를 열었다. 군부는 양원제인 국회의 상원 의원을 군부에서 임명하는 식으로 개헌했다. 총리 선출 또한 하원 독자 선출에서 양원 협력 선출로 변경했다. 사실상 군부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총리로 선출되는 셈이다.

군부 독재 반대의 목소리를 내던 차녹난과 동료들은 영화에서 나온 ‘세 손가락 경례’를 저항의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군부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헝거 게임을 단체 관람했고, 극장 앞에서 세 손가락을 들며 시위하기도 했다. 군부를 비판하면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공원에 모여 독재를 다룬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차녹난은 현재 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독재에 저항하기 때문에 지지한다”고 말했다. (윤상호 인턴 shark9694@)

차녹난, 태국 시위 지지 호소…“지금은 2020년이다”

차녹난은 현재 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위에 대해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독재에 저항하기 때문에 지지한다”고 말했다. 그는 14일 서울 이태원 주한태국대사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을 통해 태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차녹난은 “이전에는 젊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올해 초부터 대학생들이 시위에 플래시몹 등의 방식을 도입하면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며 “학생들의 시위가 유명해지면서 사람들은 점점 더 큰 규모로 길거리에 모였고 정부는 큰 압박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태국 정부에서 최루 가스와 푸른 염료가 섞인 물대포를 쏘며 시위대를 해산시킨 것에 대해 ‘정부의 실수’라고 표현했다. 차녹난은 “정부가 물대포를 사용하면 시위를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하지만 반대였다. 물대포를 쏜 이후 더 많은 사람이 시위에 나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현재 태국 사람들은 투표를 통해 군부를 선출한 것이 아니므로 그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며 “정부의 집회 금지 명령도 전혀 듣지 않는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쁘라윳 짠오차 태국 총리는 결국 21일 민주화 시위대의 요구를 잠재우기 위한 유화책으로 ‘5인 이상 집회’를 금지한 긴급 칙령을 철회했다. 15일 내린 긴급 칙령과 물대포 진압 등이 오히려 시위를 부채질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반정부 시위대는 “쁘라윳 총리는 사흘 내 퇴진하라”며 기존의 강경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차녹난은 왜 우리나라를 비롯한 다른 나라가 태국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냐는 질문에 대해 “지금은 2020년이기 때문”이라며 짧게 답했다. 그는 “우리는 UN의 회원국이고 모두 인권과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조약에 서명했다”며 “만약 태국이 민주화에 실패한다면 똑같은 일이 한국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 어떤 나라도 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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