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삼성그룹 창업주인 호암(湖巖) 이병철 회장과 박두을 여사의 3남 5녀 중 일곱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호암이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청과·건어물 무역회사인 삼성상회를 경영하던 시절이다.
형으로는 제일비료 회장을 지낸 맹희 씨와 고인이 된 창희 씨, 누나로는 인희(한솔그룹 고문), 숙희, 순희, 덕희 씨가 있다. 신세계그룹 회장인 명희 씨가 유일한 동생(여동생)이다.
사업가인 호암을 따라다니며 유소년기를 보냈다. 유년기를 대구에서 보내다 사업확장에 나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1947년 상경했다. 혜화초등학교에 다녔다.
서울사대부고를 나온 뒤에는 연세대학교에 합격했으나 호암의 권유로 일본 와세다대학 상학부로 진학했고, 와세다대학 졸업 후에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 경영대학원에서 경제학을 전공하면서 부전공으로 매스커뮤니케이션을 공부했다.
1987년 12월 1일. 서울 중구에 있는 호암아트홀에서 이건희 회장은 그룹 경영의 첫발을 내디딘다.
오늘날 삼성을 초일류기업으로 이끈 이건희 회장은, 형들을 대신해 호암 이병철 회장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목됐다. 호암은 “(이건희)본인이 희망했다”라고 짧게 설명했지만, 부친의 경영철학과 이건희 회장의 집념이 일맥상통했기 때문이라는 평이다.
애초 호암은 이 회장에게 중앙매스컴을 맡길 작정이었다. 와세다대학 재학 시절부터 이를 권했고 실제로 이 회장은 1966년 첫 직장으로 동양방송에 입사한다.
하지만 그해 불거진 이른바 '한비 사건(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사건)'이 삼성그룹의 후계구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사카린 원료 밀수가 적발된 한비 사건은 호암의 장·차남인 맹희·창희 씨가 관여한 것으로 밝혀졌으나 사건 직후에는 차남인 창희 씨만 구속됐다. 이후 호암은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제계에서 은퇴한다.
서른여섯이던 맹희 씨는 삼성의 총수 대행으로 10여 개 부사장 타이틀을 달고 활동했다. 호암은 사장단을 향해 "맹희 부사장이 거부하면 세 번 얘기해보고 그래도 안 되면 내게 가져오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호암자전에선 "주위 권고와 본인 희망이 있어 맹희에게 그룹 일부의 경영을 맡겨봤는데 6개월도 채 못돼 맡긴 기업은 물론 그룹 전체가 혼란에 빠져 본인이 자청해 물러났다"고 썼다.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구속됐다 풀려난 차남 이창희는 주변인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호암이 부정한 짓을 저질렀으니 기업에서 영원히 손 떼야 한다는 탄원서를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냈다.
호암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는 한국 땅을 밟지 마라”며 이창희를 미국으로 쫓아냈다.
그리고 끝내 삼성을 ‘선도형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누구보다 ‘앞서’ 생각했고, 누구보다 ‘먼저’ 움직였고, 누구보다 ‘멀리’ 내다봤다. 주변의 반대로 때론 고독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결국 세상이 그의 눈짓, 몸짓, 말 한마디에 기울이게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