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공동체’ 지향하지만…나라마다 다른 성소수자 인권
6월 중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서 대통령 선거 유세가 열렸다. 재선을 노리던 안드레이 두다 후보는 위의 발언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2015년 취임한 그는 중도 우파 포퓰리스트 집권 정당인 법과 정의당의 지지를 받았다. 취임 후 당적 포기 규정 때문에 이 정당에서 탈퇴했지만 그는 이 당의 후보였다. 중도 좌파 후보와의 지지도 격차가 급격하게 좁혀지자 두다가 꺼낸 비장의 카드가 동성애자의 권리 신장 공격이었다. 상대편 후보가 동성애자의 권리를 옹호했기 때문이다.
동성애자 권리 쟁점 된 폴란드 대선
당시 폴란드의 코로나19 환자 수는 3만 명을 넘었다. 5월부터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고 사망자도 1250명을 돌파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당시 폴란드 언론은 팬데믹보다 동성애 논란을 더 크게 보도했다. 선정적인 보도를 선호하는 언론의 보도 경향 때문만이 아니다.
폴란드에서 공산주의와 동성애자 권리 보장은 낯선 외국의 이념으로 척결의 대상이다. 폴란드는 2차대전 후 소련의 압제에 들어갔으나 1989년 동구권 가운데 처음으로 공산 독재에서 벗어났다. 두다 후보는 “우리 부모님들은 더 파괴적으로 보이는 동성애 권리 신장을 위해 40년 넘게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투쟁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7월 중순 결선투표에서 승리한 그는 동성애자의 결혼과 자녀 입양을 금지하는 법에 서명했다. 연임에 성공한 후 취한 첫 정책이다.
만약에 이런 발언이 독일이나 프랑스, 베네룩스 3국과 같은 나라에서 나왔다면 어떠했을까? 그 정치인은 십중팔구 정계에서 은퇴해야만 했을 것이다. 대다수의 서유럽 국가에서 동성애자의 권리는 보장돼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폴란드에서는 일부 동성애자 권리 주창 단체가 대통령을 비난했을 뿐이었다. 국민의 92%가 가톨릭 신자이다. 동성애자 비판은 가톨릭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왔다. 18세기 말 러시아와 프로이센과 같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 끼여 나라를 잃어버렸던 폴란드에서 가톨릭은 민족주의와 정체성의 상징이었다. 소련의 공산주의 압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동성애가 가족을 약화시켜 국가를 혼란에 빠트린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유럽연합(EU) 27개 회원국 간의 동성애자, 광범위한 의미에서 성소수자 권리 보장은 아주 격차가 크다. EU 차원에서 권리를 신장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수단이 부족하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말 이런 상황을 전하면서 유럽에 ‘무지개 장막’이 쳐져 있다고 분석했다. 냉전 시기 동서 유럽을 가르던 철의 장막은 30년 전에 사라졌지만.
아일랜드·리투아니아, 극과 극의 대조
폴란드와 같은 중동부 유럽 국가들의 경우 서유럽과 비교해 동성애자 권리 보장이 뒤처져 있다. 아일랜드와 리투아니아가 크게 대조적인 경우이다. 두 나라 모두 이웃 강대국과 미묘한 관계에 있고 가톨릭이 최대 종교이다. 양국은 1993년에 동성애 행위가 범죄가 아니라는 법을 제정했다. 하지만 현재 동성애자들이 누리는 권리는 크게 차이가 난다.
아일랜드는 2016년 국민투표에서 62%의 지지로 동성애자의 결혼을 허용했다. 2017년부터 3년간 총리를 지낸 레오 바라드카는 아일랜드 최초의 동성애자 정부 수반이었다. 반면에 리투아니아 동성애자의 84%는 성소수자임을 드러내기를 꺼린다. 발트해 인근에 있는 이 나라에서 동성애자 결혼 인정은 꿈도 꾸지 못한다.
유럽 최대의 성소수자 권리 옹호 민간단체인 ‘일가유럽(ILGA-Europe)’은 2009년부터 유럽과 중앙아시아 국가들의 이 분야 권리 보장 순위를 발표해 왔다. 일가유럽은 평등과 비차별, 가족관계 허용, 증오 범죄, 법적인 젠더 인정 등 6개 분야에서 각국의 정책을 검토해 평가한다.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1위는 몰타로 100점 만점에 89점을 받았다. 2위는 벨기에, 3위는 룩셈부르크, 4위는 덴마크였다. 폴란드는 꼴찌로 27위, 26위는 라트비아, 25위는 루마니아다. EU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인 1억1000만 명 정도가 성소수자를 차별 대우하는 회원국에서 거주한다.
EU 가입 후 ‘차별 법’ 부활하기도
영국이 탈퇴했지만 EU는 4억5000만 명의 인구에 세계 최대의 단일시장이다. 27개 회원국 간에는 상품이나 서비스, 자본과 노동이 자유롭게 이동한다. 회원국 시민들은 비자 없이 다른 회원국으로 이주해 일할 수 있다. 19개 회원국은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단일 화폐 유로를 사용한다. 외교와 안보 등 국가 주권의 핵심 정책에서도 EU는 협의를 통해 국제무대에서 점차 한목소리로 말하고 공동정책을 실행해왔다.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집행위)는 회원국의 법치주의 준수, 인권보장 등을 감독하고 위반이 있다면 시정을 요구한다. EU는 경제 및 정치블록일 뿐만이 아니라 가치 공동체임을 자부한다. 특히 EU에 가입하려는 국가들은 이를 준수해야 한다. 루마니아는 2007년 EU에 합류했다. 당시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법을 폐기해야만 했다. 하지만 가입 후 루마니아는 민법을 개정해 동성애자 차별을 허용했다. 당연히 집행위는 시정을 요구했지만 민법은 회원국의 고유권한이기 때문에 아직까지 이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있다. EU 회원국이 되려면 성소수자 차별 조항을 폐기해야 하기에 이때에는 집행위의 권한이 막강하다. 반대로 EU에 가입한 후 회원국들은 이런 조항을 개정해 동성애자를 차별하곤 했다.
집행위가 강력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것은 EU의 예산 지원을 끊는 경우다. 9월 폴란드에서는 약 100여 개의 도시가 ‘성소수자 이념이 없는 곳’이라고 선포했다. 법적 효력은 없지만 성소수자들을 공식적으로 배척하겠다는 것이다. 집행위는 이런 차별 조치가 유럽연합의 가치와 기본권을 해친다고 공식 경고했다. 이어 집행위는 몇몇 도시에 지원하던 EU 예산 지급을 중단했다.
또 덴마크처럼 동성애 부부에게 자녀 입양이 허용된 회원국에서 이게 불허된 폴란드로 동성애 부부가 이주할 경우 문제가 발생한다. 폴란드에서는 이들이 가족이라 인정을 받지 못해 자녀가 부모와 함께 거주할 수 없다. 이럴 경우에는 EU의 기본권인 이동의 자유를 침해했기 때문에 EU 법원에서 판결해 시정될 수 있다. 물론 보통 몇 년이 걸린다.
‘동화’ 아닌 ‘다양성’의 가치 존중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중도 우파 포퓰리스트 정당이 2010년대부터 집권하면서 언론의 자유와 사법부의 독립을 계속 훼손해 왔다. EU 집행위는 법치주의 위반을 경고하고 두 나라에 시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제재 부과 결정에는 회원국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 양국은 서로가 제재 대상이 되었을 때 거부권을 휘둘러 제재를 피해왔다. EU는 지난 3년간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아직까지 뚜렷한 진전이 없다. ‘유러피언 드림’은 동화(同化)가 아니라 다양성을 존중한다. 무지개 깃발이 동성애와 같은 성소수자를 상징하게 된 것도 그 다양한 색깔에서 유래한다. 유럽은 아주 더디지만 무지개 장막을 철거하려는 발걸음을 내딛고 있다. 매우 더딘 유럽을 보면서 우리의 현실을 떠올려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