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우 금융부장
‘갚을 능력 있어도 못 빌린다’라는 가계대출, 과열경쟁을 벌이던 은행들 태도가 하루아침에 돌변한 까닭은 무엇을까. 사실 올해 은행들이 비교적 좋은 실적을 거둔 것은 박리다매 대출 덕분이었다. 사상 최저 금리가 계속되며 순이자마진(NIM)이 하락했지만, 대출 총량이 늘어나 충격을 상쇄했기 때문이다. 3분기 기준 NIM은 1.4%로 지난해보다 0.15%포인트 하락하며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반면 가계대출 잔액은 821조 원으로 지난해보다 9.4% 급증했다. 증가 폭은 2016년 4·4분기(9.5%) 이후 3년 9개월 만에 가장 높았다. 지난달 늘어난 은행 가계대출은 13조6000억 원 규모다. 사상 최대 증가 기록을 갈아치웠다. 금융당국의 규제 시행 전 막차 수요가 몰려 신용대출이 대부분인 기타대출 증가가 사상 최대 7조4000억 원을 기록했다. 주택담보대출 증가액 6조2000억 원을 넘어섰다.
그러자 금융감독원이 “가계대출 증가세를 주시하겠다”고 경고했다. 이에 은행들은 연말까지 대출 모집인을 통한 주택 담보대출, 전세 자금 대출 모집을 중단하고 1억 원이 넘는 신용 대출을 취급하지 않기로 했다. 최근 가계대출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업권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은행 가계대출 창구는 닫힌 셈이다. 당장 주택자금이나 운영자금을 구하던 사람들이 당황하고 시장에 혼란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급하게 돈을 빌려야 할 소비자들은 분통을 터트리고 있다. 집을 사거나 전세금을 올려주거나, 내년 초 자녀 등록금을 대려 목돈을 마련해야 하는 이들은 앞이 캄캄하다.
‘패닉 대출’이란 말까지 나오는 가계대출 급증세는 우려할 만하다. 부채에 대한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주식 투자나 부동산 투자에 나서는 게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다. 이 때문에 금융당국이 대출 부실화로 이어지지 않도록 경계하고 관리해야 함은 물론이다. “한국의 부채 문제는 사람들이 깨닫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점에서 이번 규제의 취지는 공감한다. 그렇다고 대출 중단이 가계부채 대책으로 여겨서는 안 될 일이다. 가계대출 증가를 막겠다는 취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방식이 구태의연하고 거칠기 때문이다. 땅 짚고 헤엄치기식 돈벌이를 위해 무분별하게 대출을 권하다 정작 필요할 때 돈줄을 막아버리는 금융산업을 누가 신뢰할 수 있겠는가. 이런 식으로 어떻게 가계부채 문제를 연착륙시키겠다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노웅래 민주당 최고위원이 14일 최고위원회의에서 부동산 공급대책과 관련해 지적한 “은행 대출이 꽉 막힌 상황에서 공급만 늘리면 결국 현금 부자만 좋은 일”이라는 일침을 주목한다.
금융당국은 가계부채 급증을 막겠다는 여러 대책을 내놓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근본 원인인 집값을 잡지 못한 탓이 크다. 정부는 대출규제로 “집값이 안정되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급매물을 빼면 현실은 반대다. 더구나 무주택 실수요자들의 자금 융통 길마저 막아서는 상황이다. 작금의 현실에서 현금 부자가 아닌 한 자신의 자산만으로 집을 살 수요자가 얼마나 될까. 주택담보대출로도 모자라면 신용대출 등 이것저것 다 끌어모아야 할 판국이다. 그런데도 무주택자가 ‘영끌’(영혼까지 끌어쓴다는 뜻)로 집을 마련하는 것까지 막겠다는 건 시장 경제의 원리에 반하는 대책이다. 다시 말해 정책적 배려가 아쉽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연말 관리 시점을 벗어나면 연초부터 가계 대출은 또다시 급등세를 탈 것이다. 일시적으로 창구를 막는 극단적 조치보다, 선의의 피해자 보호장치 등 처음부터 대출심사 자체를 체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대출 억제 노력을 지속해서 기울이되, 갑자기 돈줄을 죄어 오히려 충격을 키우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 기준금리를 서서히 올리면서 은행권의 대출경쟁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이어 금리구조를 바꿔나가는 등의 근본대책을 펼쳐 상황이 악화하는 것을 막았어야 한다. ‘대출중단’이란 시장 불안을 키우고 역효과마저 우려되는 대증요법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정교한 처방이 필요한 시점이다. ac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