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더니 나락으로 떨어진 위상
“역겹고 가슴 아픈 광경이다. 선거 결과에 이런 식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바나나 공화국’에나 있을 일이지, 우리의 민주주의 공화국에서 있을 일이 아니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은 지난 6일(현지시간) 일어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지지자들의 의사당 난입 사태를 두고 이렇게 한탄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인의 승리 확정을 위한 상·하원 합동 회의가 광적인 트럼프 지지자들의 점거로 긴급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자, 정치권에서는 한때 글로벌 민주주의의 종주국을 자처하던 미국을 ‘바나나 공화국’에 빗대어 비아냥대는 자조적인 목소리가 잇따랐다. 친 트럼프계로 알려진 마이크 갤러거 공화당 하원의원도 “우리는 지금 바나나 공화국에서나 볼 법한 쓰레기 같은 일을 미국 의사당에서 목격하고 있다”고 맹비난했으며, 공화당 소속의 래리 호건 메릴랜드주 주지사는 작년 11월부터 트럼프 대통령의 불복 행보에 대해 “우리는 선거와 관련해 가장 존경받는 나라였지만, 이제는 바나나 공화국처럼 보이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바나나 공화국이란 표현은 작가 오 헨리가 1904년 펴낸 단편집 ‘양배추와 임금님’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겉은 그럴 듯 하지만 쉽게 썩는 바나나의 성질에 빗댄 말이다. 바나나와 같이 한정된 1차 상품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외국 자본에 예속된 국가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됐다. 냉전 시절 엘살바도르, 온두라스, 과테말라, 그레나다 같은 중남미 국가들이 대표적인 예다. 실제로 온두라스의 경우 중앙아메리카 7개국 중에서 니카라과 다음으로 국토 면적이 크지만, 경제적으로는 2007년 전체 수출에서 바나나가 65%를 차지할 정도로 1차 상품 수출에 의존했다. 현재 이 단어는 경제적 대외 의존도가 극심한 것은 물론, 부패 정치나 독재 등 정치적으로 정국이 불안정한 후진국을 경멸하는 표현으로 확대됐다.
미국은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가장 어울리지 않는 국가였다. 정치적으로는 세계가 미국의 민주주의를 신뢰할 만한 모범으로 여겼고, 경제적으로는 명실공히 글로벌 1위 경제 대국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불복 행보와 지지자들의 과격하고도 폭력적인 행동은 미국의 민주주의에 큰 상처를 입혔고,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위상을 바나나 공화국 수준으로 떨어트렸다. 미국 온라인매체 복스는 “양당제에서 민주주의는 두 정당이 모두 선거 게임의 규칙을 따르는 데 달렸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취임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게 하려는 시도 자체만으로도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는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대해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미국에서는 법 집행 요원들이 결국 군중들의 폭력을 진압했으며, 국민 대표들이 법치의 원칙에 부합해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며, 군중의 폭력이 권력의 행사를 결정하는 바나나 공화국과는 다르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의사당을 향한 부끄러운 공격 이후 정치인과 언론인을 비롯한 다수 저명인사가 미국을 바나나 공화국에 빗댔다”며 “이런 비방은 바나나 공화국과 미국의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바나나 공화국이라는 표현이 미국에 걸맞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나락으로 떨어진 미국 민주주의의 위신을 가장 잘 드러내 준다는 점만큼은 명확해 보인다.
다수의 언론은 이러한 사태의 원흉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지목했다. 미국 민주주의의 위상이 이렇게까지 떨어진 원인을 단순히 트럼프 1인에게서만 찾을 수는 없겠지만, 그가 사태를 악화시켰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좌고우면하는 기성 정치인들과 달리 화끈하고 직설적인 화법과 능숙한 쇼맨십을 자랑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누구보다 강력한 팬덤을 구축하게 됐다. 지난 4년간 숱한 거짓말과 막무가내식 행보, 그리고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도 2016년 당선 때보다 이번 대선에서 1000만 표나 더 많은 표를 획득한 것이 그의 인기를 방증한다. 그리고 강력한 팬덤을 토대로 한 그의 선동 정치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던 그의 꿈을 정반대로 몰고 갔다.
미국 퍼듀대학 영어영문학과 부교수이자 페미니스트 작가인 록산 게이는 새로 집권하는 민주당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NYT)에 기고한 글을 통해 “만약 민주당이 그들이 축적한 권력을 과감하게 사용한다면 ‘용감한 새로운 세상’이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제는 민주당이 공화당 유권자나 정치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에 대해 걱정하지 말고, 자신들의 권력을 같은 방식으로 사용하고 법을 제정할 때”라며 “민주당은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매우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이 우선인 곳보다는 이 나라를 더 공평하고 관대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지난 4년 동안 우리는 이 나라의 영혼을 위해 많은 싸움을 견뎌 왔지만,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며 “나는 바이든-해리스 정부와 제117대 의회가 이 전쟁을 끝낼 수 있길 바란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