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바이든 행정부 출범 직전…‘인권·민주주의’ EU의 가치 시험대
구랍 30일 EU와 중국은 포괄적 투자협정(Comprehensive Agreement on Investment, CAI)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자유무역협정(FTA)에도 한참 못 미치지는 조약이지만 EU가 중국에 너무 많이 양보했고, 이 조약이 미국과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의 대중국 정책을 약화할 것이라는 비판과 우려가 크다. 이런 우려는 기우라고 본다. EU는 신임 바이든 행정부와 대중국 공동정책을 계속해서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
유럽은 경제적, 중국은 정치적 이득 챙겨
유럽 기업들은 중국에 투자할 때 중국 기업과 합작을 하고 첨단기술을 의무적으로 이전해 줘야 했다. 첨단기술 ‘따라잡기’에 나선 중국 정부가 서방 기업들의 투자 허용 조건으로 이를 필수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합의된 CAI는 이런 조건을 철폐했다. 중국 기업이 유럽에 투자할 때와 같은 조건을 중국에 투자하는 유럽 기업도 누리게 됐다. 유럽 기업들은 14억의 인구에 세계 최대의 시장으로 부상한 중국 시장 접근권이 크게 개선되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공정경쟁 규정과 함께 국제기준에 적합한 환경 및 노동 기준도 포함됐다.
중국은 국영기업이 국내총생산(GDP)의 30% 정도를 차지한다. 이들은 정부로부터 막대한 보조금을 받아 시장질서를 왜곡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번 협정은 중국 국영기업의 시장질서 왜곡을 방지할 수 있는 조항과 보조금 조항도 포함했다. 국영기업이 상품과 서비스의 구매와 판매에서 외국기업을 차별하지 않도록 했으며 유럽 기업이 이 조항 준수를 평가할 수 있도록 중국 당국에 정보를 요청할 수 있다. 보조금 조항도 이와 유사하다. EU는 국영기업과 보조금 조항을 들어 중국이 외국과 체결한 협정 가운데 가장 야심찬 조약이라고 규정했다.
이번 협정으로 독일의 자동차 기업과 유럽의 금융 서비스 분야는 큰 수혜자가 될 듯하다. 폭스바겐이나 BMW와 같은 독일 자동차 기업들은 이제 중국 기업과 합작할 필요가 없다. 은행업의 합작 규정과 주식 투자 최고 한도 제도 철폐되고 주식과 보험 거래도 가능해졌다.
중국은 EU가 오랫동안 요구해온 것을 들어주는 대신, 미국이 주도해온 대중국 포위망에서 일단 벗어날 수 있게 됐다. 중국은 우리나라와 일본, 그리고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을 포함한 14개국과 지난해 11월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을 체결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 4년간 보호무역에 열중하고 양자 협정에 열중한 틈을 타서 중국이 유리한 통상 및 투자 협정을 잇따라 체결했다. 이 때문에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CAI를 중국의 외교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유럽의회 “자유·인권 무시” 수정 요구
CAI는 유럽의회의 비준을 받아야 한다. 유럽의회는 이번 협정이 중국과 홍콩의 인권과 정치적 자유를 도외시한 협정이라며 크게 반발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신장지역의 위구르인 강제 노동과 같은 인권 침해를 감시하고 제어할 장치가 부족하다는 것. 중국은 국제노동기구(ILO)의 핵심 협약 그리고 강제노동을 금지하는 협정의 비준을 위해 노력하기로 합의했다는 조항만이 있다. 협약의 준수를 모니터링하고 분쟁 해결 메커니즘이 있지만 이것으로 부족하다는 게 유럽의회의 분석이다.
유럽의회에서 제3국과의 무역과 투자 협정을 검토하는 국제무역위원회의 베른트 랑에 위원장은 6일 홍콩에서 53명의 민주 인사와 정치인들이 체포된 것을 지적하며 “이런 행동은 CAI 정신을 위반한다”며 “좌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2019년 7월에 개원한 유럽의회는 중도 좌파와 중도파, 녹색당 의원들이 과반을 차지한다. 이들은 중국이 최소한 ILO 핵심 협약과 강제노동 금지 조약 비준에 관한 구체적인 이정표를 제시해야 이 협정을 비준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美·EU 대중국 정책 공조엔 문제없을 듯
EU는 트럼프 취임 후 계속해서 대중국 공동정책을 요구했다. 하지만 보호무역과 지지층 규합에 우선이던 트럼프 대통령은 EU의 이런 요구를 철저히 무시해 왔다. 지난해 1월 미국은 중국과 1단계 무역 합의를 이뤄냈다. 미국이 중국에 부과한 고율의 관세를 줄이는 조건으로 중국은 2000억 달러가 넘는 미국 제품을 구매하고 미국 기업의 중국 시장 접근을 확대한다는 내용이다.
EU는 이번에 체결한 CAI가 위의 1단계 합의와 유사하다며 대중국 정책 공조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곧 취임할 바이든의 행정부는 매우 당혹했다. 바이든 행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지명된 제이크 설리반은 EU와 중국의 협정 타결이 임박해지자 EU에 타결을 늦추고 협의하자고 요구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CAI는 미국과 EU의 대중국 공조를 파괴할 사안은 아니다. 바이든 행정부가 공약한 대로 파리 기후변화협정에 복귀하고 세계무역기구(WTO)의 개혁에 동참한다면 EU와의 대중국 공동 정책도 일관되게 추진될 가능성이 높다.
EU가 볼 때 이번 협정은 경제와 통상에 초점을 뒀다. 무려 7년이 걸려 겨우 합의에 이르렀다. 작년 하반기 EU 순회의장국이던 독일은 원래 9월 라이프치히에서 중국과 EU 정상회담을 열어 이 협정을 체결하려 했다. 그러나 코로나19와 중국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에 협상의 진전이 없었다. 협상 막판에 중국은 바이든 행정부 취임 이전에 CAI 타결을 원했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도 순회의장국의 우선 순위로 정했던 이 협정을 매듭짓고자 했다. EU 27개 회원국 가운데 폴란드만이 신임 바이든 행정부와 협의하자며 이 협정의 타결을 늦추자고 요구했을 뿐이다. 유럽통합을 이끌어 온 독일과 프랑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EU 회원국들이 이번 협정을 조기에 타결하고자 했다. 이 협정에는 또 EU가 역점에 둬 온 중국이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준수하겠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다.
무역협정과 인권·민주주의 연계 어떻게
이제 비준 과정에서 유럽의회의 협정 개정 요구가 거세질 것이다. EU의 행정부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는 투자협정이 인권 개선을 위한 지렛대가 아니라고 본다. 반면에 유럽의회는 EU의 가치가 인권과 민주주의인데 이를 무시한 무역이나 투자협정은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무역 협정과 인권, 민주주의 연계는 당연하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이 협정이 EU의 이익을 유지하고 핵심 가치를 증진할 것”이라고 밝혔다. 최소한 유럽의회의 요구가 투자협정에 반영돼야 한다. 중국이 강제노동을 금지하고 ILO 핵심 규약을 이행할 구체적인 이행표를 제시해야 인권과 민주주의를 핵심 가치로 여기는 EU가 체면이 선다.
팟캐스트 ‘안쌤의 유로톡’ 제작·진행자, ‘하룻밤에 읽는 영국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