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C·블랙베리 주가도 천정부지
최근 일부 기업 주가가 폭등하는 현상이 발생했다. 실적이 좋은 것도, 호재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묻지마 투자’다. 사양길에 접어들었던 오프라인 게임 유통업체 ‘게임스톱’ 주가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거래 제한 여파로 60% 빠졌다가 장외 거래에서 70% 폭등하며 급등락을 연출했다. 29일 또다시 67% 폭등, 게임스톱 주가는 올해 들어서만 1700% 올랐다.
미국 영화관 체인 AMC 주가는 올해 550% 상승했다. 캐나다 IT 서비스 업체 블랙베리도 올 초 주가가 6.58달러에 불과했지만 지난달 26일 18.92달러, 27일 25.10달러로 치솟았다. 한 달 새 상승 폭이 200%를 넘어선 것이다.
이들 주가의 미스터리한 질주 뒤에는 ‘로빈후더’로 불리는 미국 개인투자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소셜미디어 레딧의 ‘월스트리트베츠’라는 토론방에 모여 타깃을 정하고 집중 매수에 나섰다. 공매도 세력이 찍은 주식이 목표였다.
헤지펀드들은 해당 주식들을 기업 가치에 비해 고평가됐다고 판단, 주가 하락에 베팅했다. ‘공매도(주가가 하락할 것을 예상, 해당 주식을 보유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식을 빌려 매도 주문을 내는 것)’에 나선 것이다.
전문가 집단이 공매도를 활용해, 배를 불린다고 여겨온 개미들은 결전에 나섰다. 개미들은 헤지펀드를 ‘기생충’이라고 부르며 토론방에서 전의를 다졌다. 지난달 27일 기준 월스트리트베츠 가입자만 380만 명에 달해 막강한 매수 파워를 과시했다. 여기에 집단 매수는 물론 옵션에도 뛰어들어 주가 폭등을 부추겼다.
하락에 베팅을 걸었던 헤지펀드들은 주가가 뛰자 다급한 나머지 ‘쇼트 스퀴즈(쇼트 포지션을 커버하기 위해 주식을 집중 매수하는 것)’에 내몰렸다. 상황이 호전되지 않자 월가 터줏대감인 헤지펀드들은 막대한 손실을 보고 백기 투항한 것이다. 유명 헤지펀드 매니저인 스티븐 코헨이 운영하는 포인트72에셋매니지먼트는 올해 들어 지난달 28일까지 펀드들이 10~15%의 손실을 봤다. ‘주식 천재’ 댄 선하임의 D1캐피털파트너스와 게이브 플롯킨의 멜빈캐피탈도 각각 20%, 30% 잃었다. 데이터 분석업체 오르텍스는 올 들어 지난달 27일까지 미국 공매도 세력의 장부상 손실이 708억7000만 달러(약 79조 원)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개미군단의 활약을 두고 시장 조작 논란도 있지만, 지원군도 등장했다. 월가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은 “헤지펀드, 사모펀드, 부자 투자자들은 그동안 증시를 개인 카지노처럼 갖고 놀았다“면서 ”의회와 행정부가 할 일을 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 상·하원은 게임스톱 사태와 관련 헤지펀드들의 공매도 행태를 조사하는 청문회를 열 계획이다.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는 개미들을 응원하는 듯한 트위터 트윗으로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었다.
사회 양극화와 불공정에 대해 축적된 불만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확산, 폭발하게 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10년 전 일어난 ‘월가를 점령하라’ 운동의 온라인 버전인 셈이다. 월스트리트베츠의 한 사용자는 지난달 27일 게시판에 “시장과 거래를 민주화시키고 있다”면서 “우리 것을 되찾아올 방법을 찾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개미들이 뒤흔들고 있는 글로벌 증시판이 과거 ‘닷컴버블’과 닮았다는 경고도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러나 당시는 월가 전문가들이 버블을 부추겼지만, 지금은 개인들이 주도하고 있어 드라마의 결말을 섣불리 예측하기 어렵다는 평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