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아동학대는 '반드시' 흔적을 남긴다

입력 2021-02-0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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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병, 첫 유모가 굶겨서,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중략) 날 꼬집고 울리고 굶기고 자기한테 돌아오게…더 쉽게 울리려고 굶겼고…3년이 지나서 부모님은 알게 되셨고, 난 위장병을 달고 살아요. 잔병이 많아요. 지금도."

연극 '킹스 스피치'(연출 김동연, 제작 연극열전)에서 조지 6세는 언어치료를 맡은 라이오넬 선생에게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털어놓는다. 영국 윈저 왕가의 세 번째 왕인 조지 6세는 자신의 아동기 때 고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유모의 학대로 위장병을 겪었고, 왼손잡이지만 오른손을 사용하도록 강요받았다. 안짱다리는 철제 부목을 대서 교정해야 했다. 형과 아버지 조지 5세는 말을 잘하지 못한 조지 6세를 윽박지르고 괴롭혔다. 그 기억들은 조지 6세에게 고스란히 트라우마로 남았다. 그의 언어장애는 기질적 요인도 있었겠지만 환경적, 정서적 요인이 증상을 심화시켰다.

지난해 4층 높이 건물에 갇혀 있다가 목숨을 걸고 옆집으로 넘어가 맨발로 탈출한 창녕의 여아, 9살 아들을 여행용 가방에 가두고 때려 숨지게 한 천안 아동치사 사건, 쌍둥이 아들 시신을 2년간 냉동실에 넣어 유기한 한부모 가정 친모에 이어 양부모에 의한 생후 16개월 입양아 사망 사건까지 아동학대 관련 사건이 계속되고 있다. 이 끔찍한 사회적 이슈는 가라앉을 틈도 없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장기간 상습적으로 학대를 받아왔지만 뒤늦게 발견됐다. 학대 정황을 의료진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해도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이 '분리 보호 조치'를 하지 않은 채 집으로 돌려보낸 일도 있었다. 다시 끔찍한 일상으로 돌아가게 된 아이들은 또 학대를 받아 숨졌다. 아동보호 시스템의 허점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목숨을 지켜도 아동학대를 받은 아이들에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는다.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은 학대 기억으로 아이들은 정신적인 고통을 겪는다. 뇌 발달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영국의 버밍엄대는 아동학대를 겪은 아이는 중증 정신질환 발병 소지가 4배 높다고 발표한 바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학교에 가지 못하고 가정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났다. 아동학대의 79%는 가정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누군가 신고하지 않으면, 아동학대를 막을 수 없다. 예방이 중요하다. 우리 주변의 아이들이 눈빛으로, 몸으로 나타내는 증상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훈육을 빙자한 폭력 아래 방치된 아이들이, 이유 모를 학대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장차 사회 구성원으로서 정상적인 삶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건 우리의 관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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