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시범아파트에 사는 A씨는 지난해 아찔한 경험을 했다. 아이와 아파트 복도를 지나던 중 아이 앞으로 천장 콘크리트가 떨어져 내렸다. 시범아파트에선 건물 연식이 50년에 가까워오면서 벽과 천장에 금이 가고 콘크리트가 부식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한때 한국 최대 아파트이자 손꼽히는 부촌 단지였던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이렇게 낡아가고 있다.
주민들 "이유 없이 재건축 허가 미루는 건 불공정ㆍ불합리"
시범아파트 정비사업위원회는 올해 초 이 같은 사례를 모아 안전사고 백서를 발간했다. 서울시와 영등포구, 국회 등에 재건축 필요성을 역설하기 위해서다. 이제형 정비사업위원장은 "소유주들이 유지ㆍ보수를 하고 있지만 안전사고 위험을 불식하려면 재건축이란 근본적인 해법이 필요하다"며 "수차례 재건축 허가를 요청하지만 명확한 이유 없이 허가를 계속 미루는 건 바람직하지 않고 불공정하고 비합리적"이라고 말했다.
관할 자치구인 영등포구도 여의도 재건축에 적극적이다. 주민 민원 해소뿐 아니라 여의도를 국제 금융 중심지로 육성하기 위해서라도 배후 주거 환경 개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채현일 영등포구청장은 지난해 이투데이와 한 인터뷰에서 "파크원 준공, 현대백화점과 페어몬트 호텔 오픈으로 초대형 상권이 생기면 여의도 개발의 스타트를 끊게 될 것"이라면서 "결국 노후화한 아파트 단지 재건축·재개발을 안 할 수 없다"는 견해를 피력해 왔다.
주민과 일선 자치구는 건물 노후에 따른 불안감 등 재건축 필요성을 호소하지만 서울시는 요지부동이다. 재건축 계획 수립을 위해선 지구단위계획과 정합성을 맞춰야 한다면서도 정작 지구단위계획 수립은 미루고 있다. 서울시는 2019년 여의도 아파트지구 지구단위계획 수립을 위한 용역을 발주, 최근 초안을 받았다.
그 내용은 '판도라의 상자'가 된 채 아직 서울시 캐비닛에 감춰져 있다. 여의도 재건축 계획이 공개되면 부동산 시장을 과열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부동산 시장에선 2017년 8ㆍ2 부동산 대책으로 내림세던 서울 집값이 여의도 '통개발' 구상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 이은형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여의도 재건축이 허용되면 인근 목동부터 시작해서 대단지 아파트 재건축 바람이 본격화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런 전력이 있기에 서울시는 여의도 재건축을 추진하는 데 신중하다. 서울시 관계자는 "여의도와 압구정, 잠실 아파트지구는 부동산 시장에 미칠 영향을 고려해 중앙정부와 협의 후 지구단위계획 내용을 결정하기로 돼 있다"며 "이미 큰 그림은 나왔지만 새 시장님이 오시면 그분께서 일정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의도 재건축 계획이 정무적 영역으로 넘어왔다는 뜻이다. 재건축을 원하는 여의도 아파트 단지에서 서울시장 선거 출마자들과 만나 재건축 필요성을 호소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각 단지 내부 문제도 재건축 사업 발목을 잡고 있다. 여의도 삼부아파트는 지난해 말 재건축 조합을 출범할 예정이었지만 내부 갈등으로 무산됐다. 자산 평가를 두고 상업지역에 속한 동(棟)과 주거지역에 속한 동 사이 이견을 좁히지 못한 탓이다. 광장아파트에서도 사업성이 높은 동이 낮은 동을 재건축에서 배제하면서 법정 다툼이 일어났다. 전문가들은 통합된 재건축 계획이 부재하면서 단지마다 혼선이 일어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일각에선 정치권과 여의도 간 절충점으로 '공공재건축'(공공주택 기부채납ㆍ공기업 참여 등 공공성을 확보하는 대신 용적률 등 규제를 완화하는 재건축 사업)을 제시한다. 주거 환경 악화를 해결하면서도 재건축에 따른 불로소득을 축소할 수 있어서다. 다만 아직 여의도 재건축 단지에선 공공재건축 사업에 부정적 입장을 천명하고 있다. 공공주택 기부채납 등에 대한 주민 거부감이 크기 때문이다. 이은형 연구원은 "현 정부 기조에서 낡은 여의도 아파트들을 새로 지으려면 재건축밖에 길이 없지만 지금 같은 시장 분위기에선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