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식 국민의힘 의원
“이번 협정은 우리의 국방 능력과 재정 수준을 반영한 것.” 제11차 한미 방위비분담금협정(SMA)에 대한 정부 관계자의 평가였다. 아리송한 말이었다. 정부가 알 듯 말 듯 한 레토릭을 구사할 때는 항상 그 이면을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진정 포장할 만한 훌륭한 일이었는지, 알맹이 없는 ‘말의 성찬’이었는지를.
‘혹시나’가 ‘역시나’로,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부는 제11차 SMA를 ‘한미 동맹 복원의 상징’이라며 자화자찬했으나, 내용을 따져보면 ‘트럼프와 바이든은 다를 바 없었다’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분담금에 대한 트럼프의 과한 인상 요구를 막아냈다는 것이 그간 정부의 입장이었지만, 이번 협상으로 정부의 실리와 명분은 모두 사라졌다.
문재인 정부는 ‘6년 협정’임을 강조했다. 매년 ‘국방비 증가율’과 연동하여 방위비를 분담하기로 합의했다. 기존 정부들은 ‘물가상승률’에 연동하도록 했는데 언뜻 들으면 그 차이를 알 수 없다. 이전에는 왜 그랬을까. 다년 계약이란 해당 기간 ‘분담금의 동결’을 원칙으로 한다. 경제 상황을 고려해도 분담금이 계약 시점과 같은 가치를 유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국방부는 ‘국방비 증가율’이라는 새로운 지표를 기준으로 제시했다. 물가상승률과 연동했을 당시의 연평균 인상률은 이명박 정부 3.2%(제8차 SMA), 박근혜 정부 2.0%(제9차 SMA)에 그쳤다. 이번 제11차 SMA의 인상률은 연평균 6.3%에 달한다. 무려 2~3배가량 점프한 셈이다. 즉 정부의 SMA 협정에 따른 국방비 증가율을 적용하면 이전 정부의 물가상승률 적용 시보다 6000억 원 이상의 방위비를 추가로 분담하게 되는 셈이다.
더군다나 문재인 대통령은 2년 전 “을지태극연습 이후 전시작전권전환에 대비하고 자주국방 역량을 굳건히 강화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국방비를 증액하여 전작권 전환을 위한 방위력 강화와 주한미군의 의존도를 낮춘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국방비 증가율에 기반을 둔 이번 SMA 협정은 자주국방을 하면 할수록 주한미군의 주둔비용이 늘어난다는 점에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모순이다.
현 정부의 교묘함은 ‘방위비분담금 협상’과 같은 단위(unit)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LH 직원들의 투기 문제를 가지치기하려는 영악함, 4·7 재보궐선거의 이유를 ‘나 몰라라’ 하는 몰지각함을 보노라면 정부·여당의 뻔뻔한 작태가 전방위적으로 벌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비상식에 대해 정부가 변명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아예 나서서 상식을 파괴하는 모습이다.
이 정권은 스스로를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정부라 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정의로움’을 독점한 줄로 안다. 이 때문에 반대세력이 목소리를 높이면 그들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해 프레임을 씌우고, 논리적인 비판들은 곧잘 배제해버린다. 아예 비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낱말들로 자신들의 치부를 감춰버리려는 나쁜 습관으로 상대에게 응하곤 한다.
촛불을 참칭한 운동권 정부의 아마추어적 비극이 국방 분야에만 그칠 리 없다. 수출은 추락을 거듭하고 성장동력은 꺼져만 간다. 대통령 집무실에 있다던 일자리 현황판을 본 지는 꽤 오래되었다. 나라의 앞날에 서린 먹구름과 적신호를 우려하는 목소리에도 코로나 핑계를 대면 그뿐이다. 따라서 남은 임기 동안 뭔가를 기대하는 자체가 희극이자 비극일 수밖에 없으리라.
지난 4년, 정부의 독선을 통해 얻은 교훈이란 무엇일까.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인도하는 일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검증되지 않은 이상론이 아니라 끊임없이 소통하고 타협하며 낮은 자세로 임하는 ‘현실감각’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이제라도 문재인 정부에 필요한 것은 현실주의적 인식과 비판에 대한 경청 그리고 무능함에 대한 자성이다. 공허한 메아리로 그치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