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정 동아대학교 국제전문대학원 교수
유럽은 전쟁과 민족대이동 등으로 잦은 국경의 변화를 겪어왔다. 또한 유럽국가들은 역사, 문화, 사회적 인접성으로 인해 농산품 및 식품에 관한 종주국 문제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이로 인해 등장한 제도가 지리적 표시제(GI·Geographical Indication)이다. 신지식재산권의 일종인 지리적 표시제는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의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 협정(TRIPs)’을 통해 국제통상 규범에 포함되었다. 해당 규정에 의하면 GI는 상품의 품질, 명성 또는 그 밖의 특성이 본질적으로 지리적 근원에서 비롯되는 경우 회원국의 영토나 지역, 지방을 원산지로 하는 상품임을 명시하는 표시로 정의된다. TRIPs 규범 내 GI는 주류 정도의 상품 보호에 그친 가벼운 수준의 제도이다. 이에 유럽연합(EU)은 유럽대륙이 수많은 서구권 농산품 및 식품, 주류의 지리적 표시와 연관된 지역이라 TRIPs 규정에 만족하지 않고 GI 제도의 확산을 주도해 왔다. GI는 스카치위스키, 카망베르 치즈 등 지명과 제품의 역사성이 결합된 형태의 상품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주력부대를 정박한 배에 남게 하고, 배 한 척만 타고 혼자 식량을 구하러 키클롭스의 섬으로 갔다. …(중략)… 동굴에는 살이 포동포동 찐 양떼와 많은 치즈, 양젖이 든 통, 주발, 우리 속에 갇힌 새끼양, 새끼염소 등이 규모 있게 있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Odyssey)의 한 부분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동굴 속 치즈는 그리스 ‘페타치즈’의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수 천 년 동안 지중해 동부 지역에서 염소와 양의 젖을 혼합해 생산한 페타치즈는 염수에 저장되어 독특한 맛을 낸다. 페타치즈가 국제무대에 다시 한 번 부상한 것은 GI 등록 문제 때문이었다. 페타치즈는 지명이 포함되지 않은 상품인데다 고대 그리스에서 만들어진 이후 오랜 역사를 통해 세계 도처에서 생산되어 왔기 때문이다. 페타치즈에 관한 유럽의 역사적, 사회문화적 인식을 고려하면 GI 제도에 관한 유럽의 가치 반영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는 이미 1930년대 페타치즈를 전통기술에 따라 생산하도록 규칙을 마련하였으며, 1988년 공식적으로 그리스 법률 내 GI 상품으로 등록하였다. EU 역내시장에서 페타치즈의 그리스 GI 등록은 허용되었으나 대외통상에서는 여전히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일례로 캐나다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리스는 연간 500톤 규모의 페타치즈를 캐나다에 수출하는데 GI를 둘러싸고 양측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EU는 GI 제도 확산을 위해 2015년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내 ‘원산지 명칭 및 지리적 표시에 관한 리스본협정 제네바조약’ 채택을 주도하여, 높은 수준의 보호가 모든 상품의 GI에 부여될 수 있도록 이끌었다.
그동안 한국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 GI 확산을 반대하는 신대륙 국가들과 의견을 동조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제 국제규범으로서 강화된 GI를 충분히 이용하여야 한다. 김치의 경우 ‘국가명 GI’가 지난해 8월부터 시행되었다. 농림축산식품부가 김치와 그 용기·포장 등에 한국 또는 대한민국이 들어가는 용어를 표시하고자 하는 자는 지리적 표시의 등록을 하도록 규정한 것이다. 관련업계에서는 이를 환영하면서도 수입 원료를 사용하지 못해 수출경쟁력에 타격을 입을까 우려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향후 GI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해야 한다. 첫째, EU와 같이 원자재 공급과 공정을 동시에 특정지역에서 수행하는 상품과 공정만을 해당 장소에서 진행하는 상품을 구분하는 GI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둘째, ‘한국 김치’뿐 아니라 페타치즈의 경우와 같이 김치 그 자체를 등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WIPO 내 ‘리스본협정 제네바조약’ 등 김치의 국제기구 등록을 추진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GI는 2002년 보성녹차를 시작으로 2020년 12월까지 총 109건의 특산물이 등록되었다. 우리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우리 것일 수 있도록 제도적 보완과 관심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