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대 석좌교수,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능력주의 (Meritocracy)는 말 그대로 능력에 의해 평가받고 일을 하게 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떤 위치에서 일을 하더라도 그에 가장 잘 맞는 능력을 가진 사람을 골라 써야 하고 승진, 보수 등에서도 집안 배경, 성별 같은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에 의해서만 평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칙에 이의를 가질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그런데 이 생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의 철학자 마이클 샌델이 대표적인 사람일 텐데 그는 인간의 능력이란 것도 상당 부분 물려받은 것, 즉 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많다는 점에 착안하고 있다.
확실히 그런 측면이 있다. 류현진 선수를 보라. 그는 많은 사람이 갖지 못한 출중한 능력 덕분에 큰 영예를 (그리고 부까지도) 누리고 있다. 그뿐인가? 위대한 학자, 예술가, 그리고 사업가까지 많은 성공의 배후에는 그들만의 능력이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그 능력은 어디서 온 것인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이것은 ‘운’이다. 혹자는 에디슨이 말한 ‘천재는 1%의 능력과 99%의 노력’이라는 점을 들어 후천적인 노력의 중요성을 더 강조할지도 모른다. 일리 있는 말이지만 남들이 쉴 때 열심히 일하는 근면성이라는 천성은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주장과 반론은 끝이 없다.
샌델은 (완전한) 능력주의가 가져오는 문제점을 두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능력에 따른 보상이라는 ‘미명’하에 과도한 소득격차를 가져온다는 점이다. 이는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다른 많은 사람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그런데 그는 더 중요한 문제점으로 사람들의 심리적 태도 변화에 주목한다. 즉 ‘성공한(능력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들은 은연중에 ‘덜 성공한(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며,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후자들이 ‘나는 아무래도 안 돼’ 하는 체념의 자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잘못된 이유는 대부분의 능력이라는 것이 사실은 운에 의한 측면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비판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런데 이 문제는 능력주의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보상체계의 문제이다(진실로 과도한 보상이 이루어져 있다는 가정하에서). 이것이 과연 과도한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그것이 잘못이라면 보상체계를 개선하면 되는 것이지 ‘과도한 보상’이 능력주의를 포기해야 되는 근거는 되지 못한다.
두 번째 비판은 다분히 학력지상주의적인 편견에 근거한 듯하다. 만약 능력의 척도가 학력(정확히는 학업수행능력)만이라면 샌델의 주장처럼 능력주의가 능력 경쟁에서 패한 사람에게 체념이라는 지극히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능력의 경쟁은 다양하게 이루어진다. 의사, 변호사, 금융전문가와 같이 학력과 성공 여부(금전적 보상을 포함한)의 상관성이 비교적 높은 직업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학력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는 다른 부문에서 성공 및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경우도 많다. 즉, 내가 학교 공부는 좀 부족했을지 몰라도 다른 부문에서 얼마든지 그에 못지않은, 혹은 더 나은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자부심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진정한 능력주의는 개인이 가지는 여러 다양한 능력 중 무엇인가를 잘 발휘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을 전제로 한다. 그것이 잘 이루어진다면 어느 한 분야의 능력을 보고 안 된다고 체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오히려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다. 만약 능력주의가 작동하지 못하면 돈 있는 집안, 권세 있는 집안의 자녀들만이 득세하는, 과거 우리가 익히 보아온 불평등한 세상이 그 종착역이 될 것이다.
능력주의가 가지는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를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오히려 그 불완전한 점을 끊임없이 고쳐나가서 능력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해야 한다. 시장경제에 여러 문제점이 있다고 해서 시장경제 자체를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