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땅 없는 설움' 중산시범 "동별로 땅 사게 해달라"
② 창고로 전락한 '한때 최고급 주상복합' 동대문상가아파트
③ 재건축 막힌 덕에 직장인 전세 성지된 서소문아파트
“요즘 같은 시대에 배달 안 되는 데가 어디 있냐?”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는 곳이 있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말이다. 바로 서소문아파트다.
“배달 전화했더니 ‘거긴 안 가요’ 하더라” 서소문아파트 8층(7층짜리 건물이지만 숫자 4를 기피하는 한국 정서상 8층이 됐다)에 1년째 살고 있는 30대 직장인 A씨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서소문아파트는 72년 준공 당시 ‘맨션’으로 불릴 정도로 고급아파트였다. 특히 하천을 따라 지어진 곡선 형태의 파격적 구조는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밀레니엄 시대 도래 후 '멋진 하루', '나의 아저씨' 등 영화와 드라마 속 배경으로 등장하며 소위 ‘레트로 감성’을 뽐냈다.
서소문아파트 살이가 영화처럼 낭만적인 건 아니다. 7층 건물이지만 엘리베이터가 없다. 기자가 마스크를 낀 채 계단을 오르내리자니 북한산을 등반하는 듯했다. 배달업체에서 배달을 거부하는 이유다. 천장 높이가 낮아 머리를 부딪힐 위험도 부지기수다. 아파트 전용 주차장이 없어 주변에 우선 주차구역을 구해야 하지만 순서를 한참 기다려야 한다.
냉난방도 시원찮다. A씨는 지난 겨울 난방비로 10만 원 이상을 냈지만 안방만 따뜻할 뿐 거실은 얼음장 같았다. 여름은 찜통이다. 높은 습도 탓에 이불과 옷은 항상 축축했다. 8층짜리 ‘옥탑방’이었다.
A씨는 “입주 당시 도배를 직접 다 했는데 건물이 오래돼서 그런지 3일 뒤 퀴퀴한 곰팡내가 올라왔다”며 “아무래도 자재가 오래돼 겉을 바꿔도 냄새가 나는 것 같다”고도 했다.
“위치랑 가격 때문이죠.” 택배도, 배달도 어려운 이곳에 A씨가 터를 잡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단순하지만 가장 중요했다.
서소문아파트에선 빠른 걸음으로 2분이면 서울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을 이용할 수 있다. 20분 안에 종각에 있는 직장까지 출근할 수 있다.
가격도 중요하다. A씨는 지난해 중소기업취업청년(이하 중기청) 전세자금대출을 통해 보증금 1억2000만 원으로 서소문아파트 8층에 전셋집을 구했다.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방 두 개를 갖춘 1억 원대 역세권 전셋집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더구나 중기청 대출은 한도가 1억 원이어서 서소문아파트 가격과 맞아떨어진다. 2030 젊은층이 50년 된 서소문아파트를 찾는 이유다.
서대문역 인근의 C공인중개사는 “광화문ㆍ시청 주변 직장인들의 입주 문의가 많고 실제로 거주하는 직장인도 많다”며 “대부분 중기청 대출을 통해 입주하고 있다”고 말했다.
‘누가 여기 살까?’ 싶지만 서소문아파트는 계절을 타지 않고 꾸준히 청년들이 찾는다. 실제 매물을 내놓으면 여의도나 시청 등 2호선, 5호선 라인의 직장인들이 찾아온다. 기자가 서소문아파트를 찾은 월요일 아침에도 서소문아파트에서는 양복 차림의 직장인들이 나오고 있었다.
집주인들 매매 대신 전ㆍ월세로 방향
다만 올해가 지나면 서대문아파트 출근길 풍경은 바뀔 수 있다. 중기청 전세자금대출이 올해 12월 31일로 종료될 예정이어서다. 12월 31일 이후론 중기청 신규 대출은 더 할 수 없고 기존 대출을 연장하는 것만 가능하다. 50년 된 아파트나마 부담 없이 구할 수 있던 버팀목이 사라진다.
한성수 국토교통부 주택기금과장은 “중기청 대출 종료 후 어떤 사업이 시행될 지 결정된 바 없다”며 “4년간 한시 사업으로 진행된 중기청 대출제도가 국민의 좋은 호응을 얻은 것은 맞지만 재원 문제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확실히 말씀드리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