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주의 시각]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입력 2021-05-27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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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인문학 저술가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에 마음을 대신하는 시 한 편을 정성스럽게 베껴 적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동전 떨어지는 소리에 못다 전한 말은 가슴에 묻고 돌아서던 시절이 있었다. 누군가는 추억 속 그 시절을 아련하게 그리워한다. 하지만 지구촌이 동시간대로 소통하는 오늘날 과거는 추억은 가능하지만 돌아가기에는 너무도 불편한 지점이다. 광속으로 이루어지는 접속의 시대에 아날로그 방식이 강요하는 느린 기다림은 그저 답답할 따름이다. 기다림의 설렘은 속도가 만드는 신기루가 집어삼켜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다. 앞으로 문명은 더 많은 기다림을 살해하리라. 현실의 필요가 사라진 굴뚝소제부들이 자취를 감췄듯이 시와 시인의 미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에 쓸모 있는 걸 만들라고 자꾸 시인의 등을 떼밀지는 말자.

오늘날 시인이란 이 세상에 널린 수만 개 직종 중 가장 하찮고 지리멸렬한 직업이다. 수입은 변변치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니 보람도 명예도 보잘 것 없다. 시인의 현실태는 현실 부적응자(김소월), 변방의 노동자(백석), 시대의 이단아(이상), 알코올 중독자(김관식), 생활 무능력자(천상병), 금치산자(보들레르), 방랑자(랭보)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속한다. 빵 한 조각이 감당하는 의미와도 견줄 수 없고, 먼지보다 더 가볍게 흩어져 사라지는 것, 그게 시다. 시는 쓸모없음으로 충만하다. 시인은 그저 실재와 아름다움에 감응하고, 몽상과 실재를 뒤섞어 새와 풀과 별을 노래하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한 묶음의 언어 다발을 직조(織造)하는 일에 평생을 바치는 이들이 시인이다.

시인들은 세계가 만든 가난을 횡단하면서도 이에 굴복하지 않고 우리가 겪어낸 삶의 시간을 다양한 이미지로 채록한다. 채록한 목록 중에는 바닥까지 내려앉은 몰락의 시간도 있다. 새벽 어판장 바닥에서 제 몸 다치는 줄도 모르고 온몸으로 파닥이는 생선들, 시인은 그 모습에서 아버지의 고단한 삶을 떠올린다. “더 이상 칠 것이 없어도 결코 치고 싶지 않은 생의 바닥/생애에서 제일 센 힘은 바닥을 칠 때 나온다”(배한봉, ‘육탁’) 등뼈가 휘는 노동을 감당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의 노고를 향해 이보다 꾸밈없는 위로를 건넬 수 있을까. 시인은 절망의 극한 속에서 다시 희망을 찾아낸다. 끓는 물도 100도가 넘지 않으면 주전자 뚜껑을 들어 올릴 수 없다. 시는 절망이 끓는 온도를 100도까지 끌어올려 마침내 그 힘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현실의 무게를 들어 올린다. 좋은 시는 삶이 우리를 아무리 여러 번 배신한다 해도 살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시인은 우리의 존재가 살아야 할 가장 숭고한 이유이고 지켜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발견하는 자들이다.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사람은 고작해야 시간의 시체일 뿐이라고 말했다. 시간의 흐름과 함께 오는 죽음은 어찌해볼 도리 없이 어느 날 우리에게 불쑥 찾아온다. 불로장생을 꿈꾸던 허황된 시도들은 이제 한풀 꺾여 장수(長壽)라는 타협 선을 찾았으나 죽음은 여전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불가해한 영역이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진리이다. 인간은 시간의 포박에서 풀려나지 못한 채 끌려간다. 시간은 결국 우리를 죽음에 데려다줄 것이다. “시간 앞에 먹이거리로 던져진 육신/어머니는 이제 손목에 시계를 차지 않았다”(정진혁, ‘시간은 사람을 먹고 자란다’) 늙은 어머니의 육신은 시간 앞에 먹잇감으로 던져진다. 늙은 어머니의 몸은 시간에 삼켜져 점점 작아진다. 늙은 어머니는 손목의 시계가 없이도 온몸으로 그 시간의 흐름을 증명한다. 시간은 어머니의 귀와 눈을 먹어치운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식사 시간처럼 어머니의 발목과 무릎까지 먹어치운다. 이를 깨달았을 때 어머니는 이미 시간의 먹잇감이 되어 사라진 뒤다. 시간의 폭력성과 야만성을 드러낸 시를 통해 우리는 삶과 죽음의 생물학적 운명과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무력함을 깨닫는다.

공장노동자인 아버지와 일용직 노동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거칠고 음울한 시대를 통과하고, 고작 서른두 살 때 화물열차에 뛰어들어 자기 생을 마감한 시인이 있다. 그건 얼마나 짧고 비참한 생인가. 스물두 살 때 국립학생구제기금을 신청하면서 직업란에 개별지도 교사, 신문가판원, 선박 급사, 도로포장 노동자, 경리, 은행원, 책 외판원, 신문 배달원, 속기사, 타이피스트, 옥수수밭 경비원, 시인, 번역가, 비평가, 배달원, 웨이터 조수, 항만 노동자, 공사장 인부, 날품 노동자 같은 일자리를 전전했다고 썼다.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을 드나들고, 공산당원이지만 당에서 제명되고, 나라에서는 선동죄와 간첩죄 따위로 강제노역이라는 종신형을 받았다. 그만큼 다채로운 불행을 겪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돌 밑의 곤충 가운데 숨어라. 갓 구운 빵 속에 숨어라. 그래도 불행은 그를 기어코 찾아내 괴롭혔다. 그 누구도 겪지 못한 불운과 비운에 짓눌리면서도 굴복하거나 패배를 선언한 적이 없는 불굴의 노동자이자 시인이었다. 제 시에 “아무것도 나를 무릎 꿇리지 못한다./잡초로 무성한 어머니의 무덤 말고는 아무것도.”라는 구절을 적어 넣었다. 헝가리의 국민시인 아틸라 요제프(1905~1937)다. 감정이 메마르고 나태해질 때 요제프의 시집을 찾아 읽는다.

내 눈아, 빛의 젖을 짜는 소녀야,/우유 통을 뒤집어라,/혀야, 키 크고 잘 생긴 청년아,/날품팔이 노동을 그만두고 환호하며/내게서 뛰쳐나가라, 짐승처럼 아시아로/땀 흘리는 숲의 뿌리로 달아나라,/등뼈야, 에펠탑 아래 내려앉아라,/코야, 항해하는 그린란드 포경선아,/내 후각에서 작살을 치워라,/손아, 로마로 순례의 여행을 떠나라,/다리야, 서로를 걷어차 도랑에 처박아라,/귀야, 그만 귀청을 내놓아라,/너의 귀청을!/허벅지야, 담홍색 캥거루야,/오스트레일리아로 뛰어가라,/배야, 가벼운 풍선아,/토성으로 날아가라! (중략)

아틸라 요제프, ‘의인’ 일부

시인은, 의로워지려면 나쁜 소식에 숙달하라, 라고 말한다. 희망은 집을 가지고 가정을 이루는 것, 행복은 아내가 곁에서 바느질을 하는 여름밤, 먼 바다로 출항하는 화물선의 경적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하지만 잔인한 세상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불행은 모기떼처럼 달려들어 몸뚱이를 물어뜯는다. 시인은 불행의 먹잇감이 되어 물어뜯기는 신체 부위들, 눈, 혀, 등뼈, 손, 다리, 귀, 허벅지, 배를 하나씩 호명하며 포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으라고 말한다. 불행이 삼킨 생일지라도 목청 높여 노래하고, 빈속에 약과 술을 먹으며, 울적한 노래로 마음을 달래던 그도 결국 무너졌다. 그의 시는 불행의 낱낱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저항과 숙고의 기록으로 의미가 있다.

시인은 언어의 부름을 받은 사람,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이기도록 도와주는 사람,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 밤새도록 달을 바라보는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칠흑 같은 세상에서 무엇으로 시에 불을 밝힐까? 시인은 자기 몸을 태워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나선다. 시인은 날마다 세상의 너무나 많은 불행 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부활한다. 인간의 불행에 나 몰라라 하는 시인은 현실의 변방을 떠도는 건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무용하고, 시인은 아무 힘도 없다. 그렇다 해도 불행의 터럭이 단 한 가닥이라도 있는 한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시는 불행을 태우고 남은 숯이 아니다. 시는 불행의 단련 속에서 더 단단해진다. 그리하여 시는 세상을 머금고 비추는 무궁한 수정(水晶)이고, 깨지지 않는 다이아몬드다. 시인은 모든 불행의 수형자들을 대신해서 밤을 새워 운다. 아틸라 요제프는 “이 모든 비참한 기억은 어떡하고/나는 정말 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는 일곱 번째 사람이 시인이라고 말한다. 감히 “인간의 영혼을 위한 전쟁의 심해잠수부”가 아니라면 시인의 존재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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