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지지 않은, 그러나 혜성처럼 떠오른 중국 최고 부호, 중산산(鍾睒睒)
文革 때 박해…가까스로 대학 들어가
중산산은 1954년 저장(浙江)성의 소도시인 주지(諸曁)에서 출생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지식인 가문이었는데, 부친은 일찍이 중국공산당의 북벌 당시 공산당 지부의 간부로 참여했으나 한때 탈당한 바 있었다. 문화대혁명 때 그 ‘탈당’ 경력으로 인해 온 집안이 박해를 받고 농촌으로 ‘하방’되었다.
그곳에서 중산산은 공부도 중단된 채 기와공장에서 일하거나 벽돌 나르는 일을 해야 했고, 나중에는 목공일을 했다. 문혁이 끝나고 개혁개방 시대가 되자 중산산은 부모에게 이제 돈을 버는 일을 하지 않고 대학입시 준비를 하겠다는 자기 결심을 털어놓았다. 부모는 크게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중산산은 초등학교 5학년까지만 다녀 대학시험에 필요한 수학, 영어 등을 아무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대학시험을 볼 수 있겠느냐는 당연한 걱정이었다. 하지만 중산산은 자기 결심을 끝까지 밀어붙였다. 그러나 그는 2년에 걸쳐 계속 낙방했다. 결국 그는 우리나라의 방송통신대학에 해당하는 대학교에 입학했다.
기자 생활, 음료 대기업 ‘와하하’ 근무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지역 신문사인 저장일보의 기자로 취직했다. 기자로서 명문의 기사를 쓰는 등 그는 유능했다. 5년 동안의 기자생활 중 그는 500명에 이르는 기업가들을 접촉하고 취재하면서 경제에 대해 많은 지식을 깨쳤고 인간관계도 넓혔다.
1988년에 남쪽 하이난(海南) 섬이 경제 특구로 선정되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하이난 섬으로 몰려들었다. 중산산도 신문사 기자직을 그만두고 그 대열에 합류하였다. 처음에 그곳에서 신문도 내보고 버섯도 재배하는 등 ‘만용’을 부려봤으나 모두 실패였다. 할 수 없이 음료업종의 대기업인 와하하(娃哈哈)에 들어가 영업사원이 되었다. 그는 우수한 영업실적으로 성공가도를 달려 2년 만에 총대리점 두 곳의 사장이 되었다. 당시 하이난 특구는 특혜 가격을 적용해 상품의 가격이 매우 저렴했다. 그래서 특구 외의 다른 지역과 가격 차이가 꽤 났다. 그는 몰래 특구 가격으로 확보한 상품을 특구 외부의 지역에 팔았다. 하지만 이 사실이 와하하 최고경영자(CEO)에게 발각되어 그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물을 생산하지 않는다, 운반해올 뿐!”
비록 중산산은 이렇게 와하하에서 ‘잘리긴’ 했지만, 와하하에서 근무하면서 음료업종과 건강보조식품 업종이 이윤이 크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특히 하이난 섬에서 자라로 탕을 만든 양생탕(養生湯)이 큰 인기를 얻고 있는 것에 주목한 그는 그 자라탕을 건강보조식품으로 상품화하여 전국에 판매하기로 했다. 1993년 양생당(養生堂)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양생당자라환’을 출시했다. 이 자라환은 3명의 중의학 전문가를 초빙하여 8개월에 걸친 연구 끝에 만들어낸 건강상품으로 순식간에 중국 전역의 시장을 휩쓸었다.
3년 뒤 그는 저장성에 있는 천연호수인 쳰다오후(千島湖)의 물을 음용수로 상품화하기 위해 ‘쳰다오후 양생당음용수’ 회사를 다시 설립했다. 이 회사의 명칭은 2001년 농푸산취안(農夫山泉)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중국 최대 음용수 기업이었던 와하하는 순정수(純淨水), 즉 일반 물을 정수한 음용수를 판매하고 있었다. 중산산은 이 와하하를 천연광천수로 넘어서고자 했다. 중산산은 “우리는 물을 생산하지 않는다. 대자연에서 운반해올 뿐이다!”라는 광고 전략으로 나갔다. 와하하가 판매하는 물은 천연이 아니라 가공된 물이라는 점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이 광고는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농푸산취안의 이윤율은 55%나 된다. 포장비가 63%로 물값 원가보다 비싸다. 그래서 농푸산취안을 중국인들은 “물의 마오타이 술” 혹은 “중국판 코카콜라”라 부른다. 그리고 2001년 드디어 와하하를 업계 1위의 자리에서 밀어냈다.
4급수 논란, 정면돌파로 넘어서
그러나 오래가는 태평은 없는 법이었다. 농푸산취안이 스스로 “천하에서 가장 수려한 물(天下第一秀水)”이라고 칭송해왔던 쳰다오후에 대하여 베이징의 한 신문이 “쳰다오후의 수질이 4급에 속한다”는 기사를 터뜨린 것이다. 4급수란 식수로서는 부적합하고 일반 공업용수로 쓰는 수준의 수질을 말한다. 농푸산취안 물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신이 극도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위기에 직면하여 본래 기자 출신인 중산산이 직접 나섰다. 그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이 보도 배후에 경쟁사의 음모가 있다고 직접 반격했다. 동시에 베이징 시장에서 철수한다고 선언했다. 이 사건의 여파로 입은 농푸산취안의 손실은 매우 컸다. 쳰다오후의 수질 검사에 오류가 있었다는 관계당국의 발표가 이어졌고, 기사를 냈던 베이징의 신문사도 문을 닫았다. 백두산의 중국 영토 부분인 창바이산(長白山) 지린(吉林)성 지역의 새로운 취수원 개발에 나선 것도 타개책의 일환이었다. 몇 년에 걸친 ‘악전고투’ 속에서도 농푸산취안은 끝내 1위의 자리를 지켜내면서 오히려 더욱 성장했다. 진정으로 중국의 거대한 음료시장을 석권하게 된 것이다.
성신·무실·효율·분투노력 ‘좌우명’
그는 사업에 투신한 이래 줄곧 ‘유상(儒商)’을 추구해왔고, 이는 평생의 사업 이념이기도 하다. 유상이란 학문과 문화를 중시하는 “선비이면서도 상인이고(士而商), 상인이면서도 선비인(商而士)” 사업가를 말한다. 중국의 대표적인 유상으로는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손꼽힌다. 공자의 천하유력(天下遊歷)은 자공의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에 비로소 가능했다. “군자애재 취지유도(君子愛財 取之有道)”, 즉, “군자는 재물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취하는 데에 도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중국 유상의 비조로 추앙되는 자공이 남긴 유상의 기풍이었다.
그는 성신(誠信), 무실(務實), 효율(效率) 그리고 분투노력(奮鬪努力)을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신문이나 방송에 얼굴도 드러내는 일이 없으며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는 기업가 친구도 거의 없고 기업가협회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명리(名利)에 담백한 성격인 그는 많은 기업가들이 선망하는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나 정치협상회의(정협) 자리에도 관심이 없다. 그는 1997년 ‘생명과학 양생당장학금’을 설립하여 빈곤가정 자녀들의 학업을 지원하고 있으며, 베이징 올림픽 지원을 비롯해 수해 복구 등 각종 공익사업에도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쾌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