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적 진입장벽 높아 업계 판도 바뀌기 쉽지 않아
대만, 미·중 갈등 한가운데 있어 지정학적 리스크 우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에 대한 업계의 높은 의존도가 세계 경제에 위험 요인이 될 것이라고 20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경고했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경쟁 한가운데 대만이 놓여있는 상황에서 TSMC의 생산 차질이 글로벌 반도체 공급 위기로 직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TSMC는 지난 몇 년간 인텔, 애플, 퀄컴 등 주요 기업들의 제품에 탑재되는 반도체를 위탁 생산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반도체 업체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 대만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올해 1분기 매출은 글로벌 파운드리 매출의 56%를 차지했다.
TSMC의 영향력은 반도체 종류를 막론하고 막대하다. 스마트폰 프로세서용 반도체는 상대적으로 정교한 기술이 필요한데, 전 세계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프로세서 약 14억 개의 대부분이 TSMC에서 제조된다. 이보다 기술적으로 덜 복잡한 차량용 마이크로컨트롤러의 최대 60%도 TSMC가 생산한다. TSMC의 시가총액은 5500억 달러(약 623조 원)에 육박해 시총 기준 글로벌 11위 회사다.
이런 시장 지배력은 TSMC의 압도적인 투자 규모와 진입장벽이 높은 반도체 업계의 특성이 맞물린 결과다. 회사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었던 2009년 경쟁업체들이 연구·개발(R&D) 비용을 줄이는 상황에서도 이 분야에 대한 자본지출을 42% 늘렸고, 이는 이후 스마트폰 붐 수혜를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됐다. TSMC는 향후 3년간 1000억 달러를 증설에 투입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상태다. 이는 업계 전체 투자의 4분의 1에 달하는 규모라고 반도체 조사업체 VLSI리서치는 분석했다.
문제는 TSMC가 전 세계 모든 반도체 수요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 있다. 특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발생한 공급 부족 사태로 이러한 문제는 더욱 분명해지게 됐다. 미국을 비롯해 유럽과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이 국가 차원에서 TSMC에 대한 의존도 줄이기에 팔을 걷어붙였지만, 곧바로 효과를 거두기엔 어렵다는 게 전문가 중론이다.
WSJ는 “반도체 기술이 워낙 정교해지고 필요한 투자 규모도 커져서 제조사 입장에선 한번 뒤처지면 경쟁자들을 다시 따라잡기가 어렵다”고 설명했다.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트는 최근 보고서에서 TSMC와 반도체 업계 시총 2위 기업인 삼성전자를 다른 기업이 따라잡으려면 최소 5년간 연간 300억 달러를 투자해야 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런 상황에서 TSMC에 문제가 생기면 전 세계 반도체 공급이 위협받게 된다. TSMC가 위치한 대만이 미국과 중국 간 갈등의 한가운데 있다는 점은 이런 우려를 키운다.
TSMC는 지난해 미국 정부의 제재에 따라 중국 화웨이와 거래를 중단하고 최근 미 애리조나주에 120억 달러 규모의 공장을 증설하겠다고 발표했다. 소식통에 따르면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는 TSMC에 30억 달러 인센티브를 약속하고 공장을 유치했지만, 현재까지 약속했던 인센티브는 받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중국에선 최근 제정된 ‘반외국제재법’을 TSMC에 우선 적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WSJ는 "현재 반도체 업계 상황이 과거 전 세계가 석유 공급을 중동지역에 의존했던 것과 비슷하다"며 “대만의 지정학적 불안전성은 업계 전체에 메아리처럼 퍼져나갈 것”이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