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 금속활자보다 10여 년 앞선 갑인자 출토…시계ㆍ총포 다량 발견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한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한글 활자 약 30점만 현존한다고 알려졌다. 국립중앙박물관 금속활자는 1455년 무렵 제작됐다. 이번에 발견된 금속활자는 이보다 20여 년 더 앞선다.
문화재청과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수도문물연구원은 탑골공원 인근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부지 내 유적'에서 항아리에 담긴 많은 금속 유물들이 한데 묻혀있는 상태로 발견됐다고 29일 밝혔다.
출토된 유물들은 △조선 전기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 △세종~중종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 부품 △세종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천문시계 △중종~선조때 만들어진 총통류 8점·동종 1점 등이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큰 관심을 끄는 유물은 세종 때 제작된 금속활자다. 한자 활자 1000여 점과 한글 활자 600여 점이 나왔다. 조선 전기의 다양한 금속활자가 한곳에서 발견된 첫 사례다.
구텐베르크가 1440년대 서양 최초로 금속활자와 인쇄술을 개발할 무렵 제작한 것으로 판단되는 유물이 포함됐다. 조선시대 금속활자는 제작한 해의 육십갑자를 이름으로 붙이는데 1434년 제작했다는 갑인자(甲寅字)를 비롯해 1455년에 만든 을해자(乙亥字), 1465년 활자인 을유자(乙酉字)로 보이는 유물이 확인됐다.
한글 금속활자 중에는 훈민정음 창제 시기인 15세기에 한정적으로 사용된 '동국정운식 표기법'을 쓴 활자와 한문 사이에 쓰는 한글 토씨인 '이며'나 '이고'를 편의상 한 번에 주조한 이른바 '연주활자' 10여 점도 있었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양한 크기의 한글 금속활자가 출토됐다"며 "아직 금속활자 분석이 끝나지 않았으나 종류가 다양해 인쇄본을 찍을 때 사용한 조선 전기 활자의 실물이 추가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자들은 구텐베르크 인쇄술보다 앞선 우리나라 금속활자 기술을 알려주는 발굴이라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조선 전기 과학유산 실물이 대거 발견된 '세계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땅속에 있던 과학박물관이 지상 위로 출현했다는 의견도 있다.
조선 제4대 임금인 세종(재위 1418∼1450)은 이상적 유교정치를 펼치고 한글을 창제한 성군으로 일컬어진다. 그의 업적 중 빠지지 않는 것이 과학기술 진흥이다.
물시계 자격루나 천문시계 일정성시의는 세종 시기 대표적 발명품으로 거론되지만, 실물은 없는 상황이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면 꿈틀거리는 용이 떠받치고 있는 듯한 일정성시의나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중앙과학관에 있는 커다란 자동 물시계가 존재하지만 모두 기록을 바탕으로 복원한 산물이다.
국보로 지정된 자격루는 중종 31년인 1536년에 만든 유물로, 청동으로 만든 물그릇만 남아 있다. 자격루와 같은 자동 물시계에서 시간을 알리는 시보 장치를 작동시키는 주전(籌箭)으로 추정되는 동제품은 활자를 제외한 다른 유물들처럼 잘게 잘린 상태로 발견됐다.
동그란 구멍이 있고 '일전'(一箭)이라는 글씨를 새긴 동판, 걸쇠와 은행잎 형태 갈고리가 결합한 구슬 방출 기구로 구성된다. 이러한 형태는 '세종실록'에 나오는 주전 관련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평가됐다.
동제품이 주전이라면 세종 20년인 1438년 제작된 경복궁 흠경각 옥루나 중종 31년인 1536년 창덕궁에 새로 설치한 보루각 자격루의 부속품일 가능성이 있다. 옥루는 현존하는 부재가 전혀 없고, 자격루는 물통 일부가 남아 국보로 지정됐다.
일정성시의는 낮에 해시계로 사용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이용해 시간을 가늠한 도구이다. '세종실록'에는 1437년 일정성시의 4개를 제작했다고 기록됐는데 전래하지 않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일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출토 유물을 복원하면 원형 고리 3점이 된다. 명칭은 각각 주천도분환, 일구백각환, 성구백각환이다.
인사동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속품으로 추정되는 동제품, 천문시계 부품, 조선시대 화포인 총통(銃筒), 동종(銅鐘)의 공통점은 모두 금속 유물이라는 것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금속활자와 물시계 부속품 추정 유물만 도기 항아리에 담긴 채로 발견됐고, 상대적으로 큰 나머지 유물은 주변에서 출토됐다.
활자를 제외하면 모두 일정한 크기로 부러뜨린 채 묻은 것으로 확인됐다. 활자 중 일부는 불에 타 엉겨 붙어 있는 상태였다.
유물이 나온 지점은 종로2가 사거리, 탑골공원 서쪽이다. 종로 뒤편에 있는 작은 골목인 피맛골과 인접한 땅이다.
이곳은 조선 전기까지 한성부 중부 8방 중 하나로, 경제·문화 중심지인 견평방(堅平坊)에 속했다고 한다. 주변에는 관청인 의금부와 상업시설인 운종가가 존재했다고 알려졌다.
금속활자 등이 출토된 층위는 현재 지표면으로부터 3m 아래인 층(16세기 중심)에 해당된다.
이들의 사용, 폐기 시점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 중 만력(萬曆) 무자(戊子)년에 제작된 소승자총(1588년)도 있다. 이를 통해 1588년 이후에 묻혔다가 다시 활용되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관계자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누군가가 유물을 모아서 폐기했을 수도 있다"며 "금속 유물을 무더기로 묻은 이유는 추가 연구를 통해 밝혀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