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주권 시대에 불매 운동은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로 여겨져왔다. 그러나 반일과 안전을 위협하는 기업의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된 ‘보이콧’과 달리, 정치색이나 가치관의 차이로 주관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선택적’ 불매 운동은 공감을 얻기 어렵다는 지적마저 나온다.
2019년 일본의 수출 제한 조치로 ‘노재팬’ 운동이 벌어지면서 일본 기업들은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다. 닛산·인피니티는 국내에서 사업을 철수했고, 한때 수입맥주 중 점유율이 60%에 달했던 일본맥주는 매출의 90%가 하락했다. SPA 의류 브랜드인 유니클로는 위안부 폄하 논란으로 점포 50여곳이 문을 닫고 매출은 2019년 9749억 원에서 지난해 5746억 원으로 반토막났다.
하지만 일본제품 보이콧에도 대체재가 없다는 이유로 일본 애니메이션와 게임의 인기는 여전하다. 불매운동 와중에도 한정판 건담 피규어와 닌텐도의 ‘동물의숲’은 품절 사태가 이어졌다. 올 1월 국내에서 개봉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는 5월 기준 20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끌어들이며 흥행에 성공했다.
최근에는 일본 불매 운동도 다소 힘이 빠지는 모습이다. 지난해 말 유니클로가 유명 디자이너 질샌더와 손을 잡고 내놓은 ‘+J(플러스 제이) 컬렉션’를 구하기 위해 서울 명동과 가로수길, 잠실 롯데월드몰 등 매장에는 오픈 전부터 수백 명이 줄을 섰다. 일본맥주 수입액도 지난해 1~5월에는 244만 달러(약 28억 원)로 직전년도보다 91% 감소했더니 올해 1~5월은 296만달러(약 34억 원)로 21.2% 반등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반일에서도 전형적인 내로남불 움직임이 나타난다”면서 “취미의 영역인 애니나 게임은 대체재가 없다며 기업에 책임을 전가하지만 사실은 남에게는 엄격하고, 자신에겐 너그러운 선택적 불매를 허용한 행동”이라고 꼬집었다.
쿠팡은 최근 덕평 물류센터의 화재가 도화선이 되며 보이콧 대상이 됐다. 소방관의 진압이 한창인 시점에 김범석 의장이 등기 이사에서 하차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책임을 회피하려는 꼼수라며 불매가 시작됐다. 내년 시행되는 중대재해법에 따르면 사업주는 1년 이상 징역이나 10억 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 김 의장의 등기이사 사퇴가 책임에서 자유롭기 위한 선택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다. 이어 욱일기 판매와 ‘새우튀김 갑질 사태’까지 불을 지폈다.
그런가 하면 어느 기업 오너 일가는 이미 미등기 임원으로 법적인 책임에서 자유롭다. 신세계·이마트 그룹의 이명희 회장과 정재은 명예회장은 미등기 임원이고,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총괄사장도 2013년 등기임원에서 이름이 빠졌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2019년 국정농단 재판에서 유죄를 받은 후 지주사와 롯데쇼핑의 사내이사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최근 지주사 등기임원으로 복귀했다.
반면 현대백화점을 이끌고 있는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은 책임 경영의 일환으로 2019년부터 등기이사로 재직 중이다. GS리테일의 수장인 허연수 부회장 역시 2013년부터 사내이사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GS리테일은 남혐 논란에 휩싸이며 불매 운동의 타깃이 됐다. 5월 페미니스트를 암시하는 ‘집게손가락’ 의혹이 터지면서다. 젠더 논란의 포스터를 만든 디자이너가 징계되고, 마케팅 팀장이 보직 해임됐지만,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GS25에 대한 질타가 계속되고 있다.
국민 정서나 안전을 위협하는 사안이 아닌 정치적 입장이나 가치관의 옳고 그름은 시대나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만큼 무분별한 보이콧을 경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서용구 숙명여대 교수는 “(최근의 불매운동은) 개별 회사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유통 및 물류회사 전반의 문제인 경우가 잦다”면서 “기업들은 비시장 위험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최근 불매운동은 타깃을 정하고 비난을 가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으로 전락한 상황”이라며 “갑자기 근무 환경이나 과거의 행태 등을 들추면 살아남을 기업은 없을 것”이라고 하소연했다.
김익성 동덕여대 교수는 “소비자 감정을 해치게 되면 어느 순간 부정적인 평판이 확산한다. 고객들의 정서에 녹아들 필요가 있다”면서도 “반일 문제나 안전과 같은 사회적 통념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 정치나 사상에 대한 잣대가 다르다고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