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버스(Metaverse)를 소재로 한 SF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Ready Player One)’ 이야기다.
이상적인 메타버스는 문화적, 경제적 경직에서 벗어나 사회 규범과 가치 체계가 새롭게 쓰여질 수 있는 새로운 개척지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동안 우리가 접한 메타버스는 피폐하고 암울한 현실에서의 도피처로 그려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 세계를 몸서리치게 만드는 동안 가상화폐, NFT(대체 불가능한 토큰), 게임, 제페토 같은 가상의 공간이 폭발적인 인기를 끈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던 것이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라는 전염병 때문에 옴짝달싹 못하지만, 메타버스에선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메타버스의 네이버 플랫폼 ‘제페토’를 보자. 디지털 아바타에게 근사한 옷을 입혀 파티에도 가고, 춤도 추고, 회사에 출근해 회의에도 참석하고, 물속이든 하늘이든 마음껏 날아다닌다.
이 몽환적인 세계에 정치인들도 빠져들고 있다. 지난 5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한 이낙연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제페토의 사이버 캠프를 공개했다. 영상 속에서 이낙연 후보는 평소와 달리, 슬림핏 정장에 스니커즈를 신고 가상 세계를 거침없이 뛰어다닌다.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허물고 비전을 여러분의 가까이에 전하고 싶다”는 이 후보의 캠프는 세상 평화롭고 아름다워 보인다.
박용진과 박주민, 이광재 후보도 제페토에 사이버 캠프를 차렸다. 아바타는 죄다 후보들의 ‘워너비(wannabe)’다. 박용진 후보는 질끈 올려 묶은 머리에, 까칠한 수염, 청바지에 슬리퍼 차림. 박주민 후보 역시 실물과 달리 머리숱도 풍성하고 얼굴도 포동포동한 모습이다. 국민의힘 대선 후보인 원희룡 제주지사도 일찌감치 제페토에 캠프를 차렸다.
후보들은 코로나19로 오프라인 만남이 제약을 받게 되자 가상 세계에서 소통의 폭을 넓히기 위해 사이버 캠프를 차렸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권의 사이버 캠프는 다소 현실과 괴리감이 있다. 제페토 이용자는 약 2억 명이라고 하는데, 90%가 해외 이용자이며, 이 가운데 80%는 투표권이 없는 10대라고 한다. 2030 MZ세대의 표심을 노리고 만든 플랫폼인데, 정작 이들은 메타버스에 대한 이해도도 낮고, 커뮤니케이션도 활발하지 않다. 또 제페토는 방 수용 인원이 16명으로 제한돼 다양한 목소리를 듣기에도 무리가 있다. 제페토 캠프를 놓고, “진정한 소통보다는 ‘젊은 후보’라는 이미지만 강조하는 마케팅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물론 긍정적인 사례도 있다. 작년 미국 46대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온 조 바이든도 선거에 임박해 닌텐도의 인기 게임 ‘모여라 동물의 숲’에 차린 사이버 캠프를 공개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대면 유세가 어려워지자 내놓은 고육지책이었다.
이게 한국 대선 후보들의 제페토 캠프와 차별화한 점은 ‘모여라 동물의 숲’의 영향력이다. 이 게임은 작년 3월 출시된 ‘동물의 숲’ 시리즈 최신판으로, 전 세계 판매량이 단기간에 2000만 개를 넘어선 메가 히트작이다. 많은 밀레니얼 세대가 즐기는 만큼, 선거 유세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젊은 세대와 소통하기 위해 첨단 기술을 빌린 건 가상하다. 하지만 초등학생들과 아바타 놀이를 하려는 게 아닌 이상, 우리 대선 후보들은 젊은 세대와의 진정한 소통을 위한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코로나로 고통받는 현실을 외면하고, 계속 가상 세계에서 ‘오아시스’나 찾는다면 ‘유체이탈’이란 조롱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