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S 드라마 ‘원 더 우먼’을 떠올리면 배우 이하늬의 ‘원맨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드라마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숨은 공신이 있다. 바로 배우 진서연이다. 초반에는 재벌가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중후반부로 가면서부터 숨겨놨던 발톱을 드러내면서 본격적인 악행을 저지르는 ‘빌런’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단순한, 1차원적인 악역이 아니다. 내재됐던 결핍, 열등감 등이 악행으로 이어지지만,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오히려 톤을 낮추고 숨긴다. 이하늬가 에너지 넘치는, 발랄함을 보여줬다면 진서연은 이와 대비되는 표현으로 작품의 균형을 맞추는 영리함을 보여준 것이다.
4일 오전 화상으로 만난 진서연은 “그간 센 캐릭터를 많이 하다 보니 더 이상은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계속 센 역할만 하다가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원더우먼’ 한성혜는 1차원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빌런이어서 선택을 하게 됐다”고 드라마를 선택한 이유를 밝혔다.
‘원 더 우먼’은 하루아침에 재벌 상속녀로 인생 체인지된 불량 지수 100%의 여자 비리 검사의 이야기를 그린다. 진서연은 비리 검사 역을 맡은 이하늬의 시누이로 대립을 이루는 빌런 한성혜 역을 맡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후계구도에서 밀려난 한성가 재벌그룹 장녀로 각종 악행을 저지르며 드라마에서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성가를 차지하기 위해 가족까지 해치며 모든 등장인물들과 대립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진서연이 해석한 한성혜는 위기 속에서도 냉철함과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기존 드라마에서 보여졌던 빌런들은 화를 내거나, 악을 쓰는 등 힘이 많이 들어간 모습일 거예요. 우리 드라마에서 이하늬 씨가 맡은 캐릭터는 1인2역에 다이나믹한 모습을 보여줘야 했고, 저는 반대로 힘이 빠지고 차분한 모습을 보여줘야 된다고 생각했어요. 비슷한 하이 텐션은 재미 없잖아요. 의도적으로 무미건조하게, 감정을 많이 드러내지 않았죠. 제가 생각하는 최고 상류층의 모습은 이런 거였어요.”
“캐릭터에 몰입할 때 ‘미친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구체적으로 준비를 많이 한다”는 진서연은 작품을 맡을 때 마다 전사 구상을 위해 노력을 기한다고. 특히 이번 한성혜 캐릭터를 만들어가기 위해 진서연이 집중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원래 작품 시작 전에 레퍼런스를 많이 준비하는 편인데, 한성혜 캐릭터는 오히려 준비를 안했어요. 이 캐릭터가 처한 환경, 무게들만 표현을 해도 충분할 거라 생각했죠. 제 캐릭터까지 많은 것을 보여주려고 하면 드라마가 과해지고, 말하고자 하는 바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 같았거든요. 조용히 묻혀 지내다가 점점 야망을 표출하면서 마지막엔 폭발해버리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최대한 빼고 욕심을 버리고, 또 내려놓으려고 노력했어요.”
배우로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내려놓는 연기는 오히려 더 어려울 법도 하다. 진서연은 자신과 반대인 캐릭터인 이하늬의 시원하게 내지르는 연기가 부러웠다고도 했다. 그러나 감정을 억제하는 한성혜 캐릭터를 통해 오히려 새로운 ‘연기의 맛’을 알게 됐고, 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었다.
“이하늬 씨의 캐릭터가 정말 부러웠어요. 하늬 씨가 어떻게 연기할 지 호기심 있게 지켜봤죠. 제가 생각했던 120%를 연기하셔서 너무 속이 시원했고, 제가 대리만족 했던 것 같아요. 감정을 누르면서 한 연기는 힘들긴 했어요. 눈빛이나 뉘앙스, 호흡으로 감정을 표현해야 했거든요. 제 나름대로 저의 새로운 발견을 해서 좋았고, 절제하는 연기의 맛이 있고, 세련됐다는 걸 알게 됐죠.”
2018년 영화 ‘독전’ 보령 역을 빼고 진서연을 논하기는 어렵다. 당시 그 어떤 작품에서도 본 적 없는 파격적인 캐릭터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바. 이후 주로 센 역할들만 캐스팅 제안이 와서 고민이 많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독전’ 보령 역은 배우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보여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과 자신감을 심어준 고마운 캐릭터다.
“제가 가진 위치에서 기회가 주어지면 최선을 다했어요. 항상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죠. 자신감이 많이 없는 편이었는데 ‘독전’ 이후로 자신감을 갖게 됐죠. 사람들이 인정해주시고 칭찬해주시는 것들이 저에게 큰 응원이 됐거든요. 그 전에는 제 자신을 못 믿었다면 ‘독전’ 이후 잘 나아가고 있다는 믿음이 점점 쌓이면서 연기에 집중 할 수 있었어요.”
매 작품마다 독보적인 캐릭터 표현으로 호평 받은 진서연은 ‘원 더 우먼’을 통해 새로운 빌런 캐릭터를 제시하며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진서연에게 ‘원 더 우먼’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었다.
“드라마 촬영은 호흡이 빨라서 어렵고 힘들어요. 제가 준비할 시간이 많이 없어서 드라마에 누가 되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하면서 촬영했어요. 제 스스로에게 점수를 주기 민망할 정도로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요. 준비할 시간이 많이 없었어도 맡았으면 해냈어야 하는 건데, 제 만족도로 따지자면 60% 정도죠. 다음에 이런 캐릭터를 맡았을 때는 감정을 표출하지 않으면서 감정을 강하게 전달할 수 있는 연기를 보여드리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