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만난 중유럽 국가 정상들이 잇달아 원전 사업의 중요성을 거론하면서 우리나라 탈원전 정책의 모순점 논란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문 정권이 이산화탄소(CO2) 배출량을 사실상 ‘제로(0)’로 하는 ‘탄소중립’을 2050년까지 달성하기로 상황이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국내에서는 “탈원전”을 외치고, 해외에서는 “원전 수출”을 홍보하는 상황. 탈원전과 탄소중립은 양립할 수 없을까요.
5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안드레이 바비시 체코 총리는 4일(현지시간) ‘한국-비세그라드 그룹(V4·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등 중유럽 4개국 협의체) 정상회의’를 마친 뒤 공동언론발표에서 체코 두코바니 지역에서 진행되는 신규 원전 사업과 관련해 “한국이 입찰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해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한국은 훌륭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고 또 아랍에미리트(UAE)에서도 원전 건설을 성공한 만큼, 우리와도 진지한 논의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문 대통령도 한국이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성과 안전성을 바탕으로 40여 년 간 원전을 건설·운영한 점을 강조하며 체코의 신규 원전 사업 과정에서 한국 기업에 대한 각별한 관심을 요청했다고 합니다.
앞서 한국과 폴란드 정상회담에서도 문 대통령은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에게 “양국의 협력이 인프라, 방산, 원전 분야로 확대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고, 한국-헝가리 정상회담 후 아데르 야노시 헝가리 대통령은 “원전 에너지 사용 없이는 탄소중립이 불가하다는 것이 양국의 공동 의향”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이를 두고는 문 정부가 해외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국내에서 추진하는 탈원전 기조와 모순된다는 지적이 거세게 일고 있습니다. 국민의힘 양준우 대변인은 논평에서 “정부는 국내에선 원전 사업을 사장시키고 우수 인재는 전부 해외로 유출하며 탈원전 정책을 추진했다”며 “바다만 입장이 건너면 달라진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러자 청와대 측은 “(한국과 외국이) 서로 윈윈하는 협력 방안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고 해명했습니다.
위의 에피소드는 우리 정부가 ‘탄소중립’과 ‘탈원전’을 동시에 달성해야 한다는 딜레마에 빠졌음을 보여주는 일례입니다.
문 대통령은 헝가리 대통령과의 대화에서 “2050년 탄소중립까지 원전 역할을 계속시키거나 신규 원전 건설은 하지 않고 설계 수명이 종료된 원전은 폐쇄하고 태양광·풍력, 특히 해상풍력 등 신재생에너지와 수소에너지 비율을 높임으로써 탄소중립을 달성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러나 한국 정부의 ‘탈원전 정책’은 2050년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 온실가스 삭감 목표(NDC)를 40% 끌어올린 정부의 결정과 상반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문 대통령은 그동안 기후위기의 ‘지급성’을 강조해왔습니다.
일부 에너지 분야 전문가들은 “지급성을 위해서라면 오히려 원전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최근 한국에너지학회·한국원자력학회 회원을 대상으로 ‘2030NDC와 탄소중립 정책’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에 따르면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감안하면, 원전 비율을 확대해야 한다”는 응답률은 79.3%, “현재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응답률은 15.5%였습니다. “원전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은 5.2%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탈원전 강행’이라고 불리는 문 정부의 정책은 모순된다는 지적이, 보다 힘을 얻고 있다는 방증입니다.
전체 전력의 70%를 원전으로 생산하는 ‘원전 대국’ 프랑스는 2014년 6월 원전 비율을 2025년까지 50%로 낮추기로 결정했었습니다. 그러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 취임 후인 2017년 11월 해당 목표 시기를 2035년으로 연기했습니다. 더 나아가 프랑스는 최근에 더 나아가 300억 유로 규모의 산업 재활성화 계획 ‘프랑스 2030’에 소형 원자로 개발에 대한 10억 유로(약 1330억엔)의 투자 계획을 내놨습니다.
영국도 2050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정부의 ‘넷제로 전략’의 중심에 원전이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옵니다. 영국의 노후 원전은 2035년경이면 거의 수명이 다하기 때문에 원전 비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새 원전을 건설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세계 최대 탄소 배출국인 중국도 탄소중립 달성을 위해 향후 15년간 최소 150기의 새로운 원자로 건설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국가들이 지난 35년 동안 건설한 것보다 많은 양입니다.
주요국들이 이런 움직임에 나선 건 신재생에너지의 불안정성 때문입니다. 스페인의 경우만 보더라도, 2000년 전력 생산의 36%를 차지했던 석탄 비율을 2019년에 5%로 줄이고, 태양광 및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비율(원전 비율은 21%)을 대폭 높였습니다. 그러나 올여름 이후 바람이 크게 약해져 풍력발전량이 20%나 감소하였고, 그 영향 등으로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전력 1메가와트 아워당 도매가격은 1년 전의 6배에 해당하는 230유로까지 상승했습니다. 올 9월 유럽의 풍력발전 비중은 9.3%로 지난해 9월 11.6%보다 2.3%포인트 감소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천연가스 가격은 연초보다 2.6배 이상 올랐고, 전기요금은 독일은 242%, 영국 284%, 프랑스는 310%, 스페인은 335% 각각 올랐습니다.
전력요금이 오르면서 철강, 비료 등 일부 에너지 다소비 업체에서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등 산업계에서 피해도 있었습니다. 이 결과, 프랑스 등 유럽 10개국의 경제ㆍ에너지 담당 장관은 공동 명의로 “유럽에는 저렴하고 안정적이고 독립적인 에너지원인 원자력발전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탄소중립의 핵심은 지구 온도를 낮추기 위해 30년 안에 온실가스를 배출한 만큼 흡수하거나 가두어 실질 배출을 제로(0)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전 사회적으로 화석연료 사용을 파격적으로 줄이는 탈탄소 사회가 이뤄져야 합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생기는 에너지 공백입니다.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면 그 대체재로 원자력 등 기존 에너지원을 적절히 활용해야 하는데, 문 정부가 탄소중립과 탈원전 정책을 한꺼번에 밀어붙이면서 논란을 야기하고 있습니다.
전경련이 지난달 27일 개최한 ‘2050 탄소중립을 위한 합리적 에너지정책 방향’ 세미나에서는 정부의 탈원전 기조에 대한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요약하면, 우리나라는 제조업 비중이 높고, 신재생에너지 자원이 부족해 탄소 감축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소요되는데도 정부가 탈원전 기조를 유지하는 등 무리하게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유환익 전경련 기업정책실장은 “에너지 위기를 맞은 중국, 영국 등 주요 국가들이 신재생에너지 발전과 함께 원자력과 석탄발전을 계속 추진하겠다는 에너지정책을 발표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탄소중립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에너지 공백을 방지하기 위해 원자력발전을 기저 에너지로 활용하고, 석탄발전도 급격히 축소하기보다는 점진적으로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절충안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 차세대 원자력발전소인 소형모듈원전(SMR)입니다. 중국은 석탄화력발전소 건설과 함께 2025년까지 원자로 신규 건설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영국은 SMR 등 대규모 원자력발전 프로젝트에 대해 예산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프랑스도 SMR 등에 10억 유로를 투자할 방침입니다.
SMR는 주류 원전의 20분의 1 이하로 출력을 억제한 소형 원전입니다. 원자로 자체를 거대한 수조에 가라앉히는 구조여서 안전성이 높고, 주요 부자재를 공장에서 제작하고 현장에서 조립하기 때문에 건설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고 합니다.
문 정부 출범 전 80%가 넘었던 국내 원전 가동률은 2018년에 67%까지 떨어졌다가 2020년에는 다시 75%까지 상승했습니다. 전력수급난과 전기요금 인상에 대한 기업·소비자의 반발에 가동을 중단했던 원전을 재가동한 탓입니다.
우리나라도 SMR 연구·개발에 나섰습니다. 7월 민관학이 공동으로 SMR에 관한 첨단 연구를 하는 ‘문무대왕과학연구소’ 건설에 들어갔습니다. 김부겸 총리는 올 6월 국회 답변에서 “원전은 향후 60년간 주요 에너지원이 될 수밖에 없다”고 발언했습니다. 문 정부의 탈원전이 무리라는 걸 인정한 셈입니다.
한국의 작년 전력원 중 원전은 18.2%를 차지해, 액화천연가스화력(32.3%), 석탄화력(28.1%) 다음으로 많았습니다. 평지가 많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대규모 태양광발전소 설치가 쉽지 않습니다. 무분별한 산림 훼손이 이뤄지는 이유입니다.
동덕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박주헌 교수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원전을 포기하고 재생에너지를 늘려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는 계획은 허상에 가깝다”고 지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