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연금이 16년 만에 제도적 변화를 맞게 되면서 수익률 제고에 대한 기대가 다시 커지고 있다. 정기예금 금리보다 못한 연 1% 안팎의 ‘쥐꼬리 수익률’이라는 오명을 벗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분석이다.
투자 중심 퇴직연금을 정착시킨 미국, 호주처럼 ‘연금 백만장자’가 나올지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난 9일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개정안은 퇴직연금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도입을 골자로 한다. 내년 6월 처음 시행되는데, 근로자가 별도 운용 방법을 고르지 않더라도 알아서 사전에 지정한 포트폴리오(자산 구성)로 운용하는 제도다.
그동안 퇴직연금은 근로자의 운용 지시가 없는 경우 예·적금 등 원금 보장형 상품에 자동으로 투자했다. 이에 근로자와 퇴직연금 사업자의 무관심으로 ‘저수익’ 현상이 심해지고, 노후 자금이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원금 보장형 상품 비중은 89.3%에 달했다. 이 상품의 지난 상반기 수익률은 1.0%에 그쳤다. 같은 기간 실적배당형 상품 수익률은 18.7%에 달했다.
디폴트옵션이 도입되면 낮은 퇴직연금 수익률을 높일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실제 연금 선진국인 미국, 호주 등은 일찌감치 디폴트옵션을 도입해 운영하고 있다. 특히 긴 호흡을 갖고 적극적인 투자를 해 연금만으로 백만장자가 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미국은 ‘401k’ 제도를 1981년부터 운용하고 있다. 401k는 미국의 대표적인 퇴직연금이다. 확정기여형 퇴직연금과 비슷한데, 근로자가 운용 방법을 직접 지시하는 것이 특징이다. 자산 규모는 최근 6조4000억 달러까지 늘었다.
성과도 좋다. 피델리티자산운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미국에서 100만 달러(약 11억2000만 원) 이상 연금계좌를 보유한 가입자 수는 26만2000명에 달했다. 연금 백만장자가 많아질 수 있었던 비결로는 주식과 같은 위험자산 장기 투자가 꼽힌다.
호주는 디폴트 옵션을 적용한 ‘마이슈퍼(My Super)’ 제도를 도입하면서 퇴직연금 시장이 탄력을 받았다. 그 중 ‘슈퍼애뉴에이션’은 위험자산에 대한 투자 비중이 높다. 위험자산 비중을 높여 장기 수익률에 긍정적 영향을 주기 위해서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슈퍼애뉴에이션은 국내외 상장, 비상장 주식 투자 비중이 47.4%로 절반에 가까웠다. 현금과 채권 등 안전자산은 그 비중이 34.7%로 배분돼 있었다.
영국은 2012년 근로자를 위한 강제 가입형 퇴직연금제도(NEST)를 도입했다. NEST 또한 근로자의 특별한 운용 지시가 없으면 정부가 사전에 지정한 디폴트펀드로 운용하고 있다.
김병덕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연구보고서를 통해 “인구구조, 분산투자, 비용구조, 시장, 경제 환경 등을 고려할 때 한국은 디폴트옵션 도입이 시급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디폴트옵션 상품 구성 시에는 연령, 위험 선호도, 납입 방법별로 위험 수준을 쉽게 판별 가능해야 한다”면서 “수수료 상한 설정, 공시 체계 및 의무 부여 등의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