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영향력 되찾으려 가장 큰 도박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99년 집권한 푸틴이 러시아의 잃어버린 영광을 되찾기 위해 가장 큰 도박을 벌이고 있다고 2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옛 소련의 글로벌 영향력을 되살리기 위해 판을 흔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1917년 볼셰비키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등장한 최초의 공산국가 소련은 1991년 12월 사망 선고를 받았다. 개혁개방 물결을 타고 1989년 동유럽에 민주화 혁명이 번지면서 공산당 정권이 잇달아 무너진 결과다. 옛 소련의 핵심국가인 러시아와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등 3국 정상은 소련을 해체하고 느슨한 형태의 국가 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을 창설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러시아는 최근 서방에 안전보장을 요구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의 동진 중단과 중유럽 배치 전력 철수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를 위해 2차 대전 이후 최악의 전쟁 발생 위협을 고조시키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병력을 배치했고 쿠바와 베네수엘라에 무기 배치 가능성까지 언급했다.
러시아는 왜 우크라이나를 인질로 삼고 있을까. 우크라이나는 옛 소련 국가 가운데 인구 2위(약 4000만 명)의 산업적으로 가장 발전된 곳이었다. 우크라이나와의 결별은 러시아가 글로벌 영향력을 급격히 잃어간 배경이었다.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인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우크라이나 없이 러시아는 제국이 될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를 품게 되면 러시아는 저절로 제국이 된다”고 평가한 바 있다.
푸틴도 우크라이나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왔다. 지난해 7월 군대에 보낸 글에서 “서방의 음모가 두 나라를 갈라놓았다”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하나의 민족이다. 러시아와 우크라 사이에 생긴 벽이 공통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가지는 상징적 의미도 크다. 민주화된 우크라이나는 푸틴이 소련 붕괴 폐허 위에 건설한 권위적 국가에 전략적 위협이 된다. 푸틴과 그의 ‘이너 서클’ 부패에 분노하고 있는 러시아 민주화 세력에 힘을 실어줄 수 있어서다. 러시아 내 정치 개혁의 촉매제가 될 가능성도 있다. 우크라이나의 친서방행은 러시아 정체성의 핵심을 건드리는 것으로 러시아에 심각한 도전이 되는 셈이다.
비가우다스 우사카스 러시아 주재 EU 대사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의 영향력을 막는 것은 푸틴에게 일종의 정치적 의무”라고 평가했다.
주변국에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대를 배치한 푸틴은 총구를 겨누고 협상에 나설 수 있게 됐다. 인근 구소련 국가들에게 서방이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런 푸틴의 전략에 서방은 이렇다할 대응을 못하고 있다. 푸틴의 덫에 서방국이 걸려 들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푸틴의 정적으로 1년째 수감 중인 알렉세이 나발니는 “서방국들이 푸틴의 말도 안되는 얘기를 무시하지 않은 채 회의를 열면서 대응하고 있다”며 “러시아의 우크라 침공 위협과 제재를 연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게 바로 푸틴이 원하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러시아 천연가스에 대한 유럽의 의존도가 높아진 점도 푸틴이 과감한 도박에 나설 수 있는 배경이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과 협력해 대러 대응에 나서면서도 강경 제재 후폭풍을 우려하고 있다. 러시아의 가스 공급 보복으로 가뜩이나 치솟은 천연가스 가격이 폭등할 수 있다는 불안이다. 러시아와 노드스트림2로 묶여 있는 독일은 우크라이나의 무기 제공 요청을 거부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 자체적 집단안보체제 구축이 필요하다면서 러시아와 솔직한 대화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를 결코 잃을 수 없는 푸틴이 약점을 지닌 서방을 상대로 사상 최대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