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가장 많은 유니콘과 8조 원을 눈 앞에 둔 벤처 투자 실적에도 벤처기업을 육성할 제도적 장치는 미비하다는 데에 업계는 입을 모은다.
현재 벤처업계가 가장 숙원하는 법적 장치는 복수의결권이다. 차등의결권으로도 불리는 이 제도는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벤처기업법) 개정안에 포함돼 있다. 비상장 벤처기업 창업주의 지분율이 30% 미만인 경우 창업주에게 복수의 의결권이 있는 주식을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골자다. 창업주의 의결권을 강화하고 경영권을 보장해 장기투자 유인을 늘리기 위한 취지다.
그러나 현재 이 법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가 지난해 12월 초 전체회의에서 해당 법안을 의결했지만, 법사위가 같은 달 8일 전체회의에서 재벌 세습 도구로 악용될 수 있다는 비판이 나오자 의결을 보류하고 추가 논의하기로 해서다. 복수의결권이 벤처기업 경영자의 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고, 상장 후 3년이 지나 창업자의 의결권이 대폭 축소되는 일몰조항을 삭제하는 논의가 이뤄지면 형평성을 위해 재벌기업에도 복수의결권 주식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게 반대론의 주요 논리다. 지난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복수의결권 도입을 약속했던 민주당도 이 제도가 재벌 세습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다.
벤처업계는 복수의결권이 없는 상태에서 벤처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유치할 경우 창업주 지분율이 급격히 떨어져 경영권 방어가 어려워진다고 입을 모은다. 벤처기업협회, 코리아스타트업포럼, 한국벤처캐피탈협회 등은 최근 성명서를 내고 “창업주 마음대로 복수의결권을 발행할 수 없고, 복수의결권주식이 상속·양도되거나 창업주가 이사직에서 사임할 경우 자동으로 보통주로 전환된다”며 “이런 안전장치가 있는 데도 아직 발생하지 않은 가능성만으로 벤처업계의 염원이 묵살되는 것이 유감스럽다”며 제도 도입을 촉구했다.
제도 도입이 지연될 경우 규제를 피해 플립(해외법인 전환)을 고민하는 유망 스타트업이 늘어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또 스타트업·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위축시킬 가능성도 제기된다. 벤처업계 관계자는 “복수의결권 제도가 기업의 가치로 연결되진 않는다”면서도 “다만 규제 환경이 예측가능성이 떨어뜨리고 투자 환경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유정희 벤처기업협회 혁신벤처정책연구소 부소장은 “혁신벤처기업들이 적극적인 투자유치와 성장전략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제도와 기반이 필요하다”며 “정책이 혁신을 따라가지 못해 글로벌 경쟁에서 낙오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