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자산운용사들이 판매한 러시아 펀드의 신규 설정과 환매가 중단됐지만, 펀드 자금 유출입은 거의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투자자 대다수가 환매를 요청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서방국가들의 금융제재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제2의 모라토리엄’ 사태가 올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이럴 경우, 러시아 우크라이나 사태가 끝나도 투자자들이 투자 금액을 온전히 돌려받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4일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서 받은 지난 3일 기준 운용되고 있는 러시아 주식형 펀드 10개를 살펴본 결과, 지난 2일 기준 러시아 펀드의 총 설정액은 1645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 1월 3일 기준 총 펀드 설정액이 1520억 원인 것과 비교해보면, 투자자들은 투자 금액을 환매 신청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펀드 설정액은 투자자의 투자금이 펀드에 투자된 원금을 의미한다.
앞서 국내 러시아 펀드를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들은 러시아 주식형 펀드의 신규 설정과 환매를 중단하기로 했다. 러시아 중앙은행이 자본 유출을 막기 위해 지난달 28일부터 외국인 투자자의 주식 매매거래를 막았기 때문이다.
가장 규모가 큰 ‘한화러시아’ 펀드(584억 원)를 운용하는 한화자산운용은 2일 펀드의 신규 매입과 환매 중단을 결정했다. 같은 날 신한자산운용과 키움투자자산운용도 환매 연기를 시행하기로 했다. KB자산운용의 경우에는 지난달 25일부터 러시아 펀드 환매를 연기한 상태다.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의 경제제재로 러시아가 국가 부도 위기에 놓였다는 것이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들이 러시아 국가신용등급을 일제히 낮췄다. 3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이날 러시아의 장기 신용등급을 기존 ‘BB+(투자 부적격)’에서 ‘CCC-’로 강등했다.
이날 무디스(Moody's)와 피치(Fitch)도 러시아 국채신용등급을 ‘투기등급(정크)’으로 무려 6단계나 낮췄다. 피치는 “단일 국가의 6단계 강등 사례는 경제 위기로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을 받은 지난 1997년 한국 이후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자금줄이 막히면서 자금 유동성도 떨어진 상태다. 일찍이 러시아 은행들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결제 망에서 배제됐다. 여기서 배제된다는 것은 러시아 기업과 개인의 수출입 대금 결제, 해외 대출·투자가 전부 막힌다는 것을 말한다. 루블화 가치도 급락한 데다 러시아 내에서 대규모 현금인출(뱅크런)이 발생하면서 달러 유동성이 더욱 떨어졌다.
유승우 DB금융투자 연구원은 “마지막 달러 유입 창구인 오일ㆍ가스까지 제재가 확대될 경우 채무 상환 여력은 더욱 위축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사태가 끝나도 러시아 경제가 회복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 펀드 투자 금액을 온전히 돌려받기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용택 IBK투자증권 이코노미스트는 “핵심은 (제재가 풀린 후) 러시아가 얼마나 빨리 금융 시스템에 복귀하고 묶여 있는 자산을 현금화 할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라며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까지 안 가더라도 러시아 경제 자체가 회복되는 데는 시간이 걸릴 수 있다”라고 내다봤다.
유동원 유안타증권 글로벌인베스트 본부장은 “과거에 러시아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해서 부채를 탕감한 경험이 있어 사실상 리스크 프리미엄을 높게 잡아야 한다”라며 “여기에 러시아 중앙은행이 금리를 20%까지 올린 상황에서는 현재 가치가 산출되지 않는다”라며 러시아 투자의 위험성을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