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착용했던 ‘호랑이 브로치’ 덕분에 요즘 핫하게 주목받는 명품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200년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명품 브랜드 ‘까르띠에’입니다.
김 여사의 브로치 제작자는 단지 호랑이를 표현한 건데, 하필 2억 원대인 까르띠에 팬더 컬렉션의 가품 논란에 휩싸여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호랑이면 다 까르띠에냐”는 것이죠. 김 여사의 브로치는 우리나라 전통 민화에서 영감을 얻어 제작됐다고 합니다. 비슷할 뿐 모조품은 아니라는 것이죠.
팬더는 까르띠에 컬렉션 중에서도 가장 정교한 디자인과 품질, 높은 가격으로 소장 가치를 자랑합니다. 욕망과 매혹의 상징인 팬더는 도전과 힘, 자유를 나타내 착용하는 사람의 개성을 강하게 드러내죠.
그렇다 보니 팬더 컬렉션은 모방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짝퉁을 구분하려면 역사부터 알아야죠. 생산 시기와 모델, 일련번호는 그 다음입니다.
팬더 컬렉션의 탄생은 191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루이 까르띠에는 프랑스의 삽화가(일러스트레이터) 조르쥬 바르비에에게 보석 전시회 초대장에 쓰려고 ‘숙녀와 팬더(Lady With Panther)’란 수채화를 의뢰합니다. 1900년대 초 파리는 패션의 중심지였는데, 그 속에서 바르비에는 패션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으로 유명했습니다. 당시 랑방과 잔느 파킨, 코코 샤넬 같은 디자이너들의 드레스 일러스트레이션은 모두 바르비에의 손끝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루이의 주문에 바르비에는 진주로 된 롱 소트와르를 걸친 현대적이고, 세속적이며 매혹적인 여성과 그녀의 발밑에 매끈하게 빠진 블랙 팬더(검은 표범)를 그려 넣어 강렬한 아르데코 스타일의 보석 전시회 초대장을 완성합니다.
(후에 사람들은 이 초대장이 까르띠에와 팬더의 첫 연결고리였고, 아울러 루이와 그의 뮤즈였던 잔느 투생과의 관계를 최초로 공식화한 것이었다고 평가합니다.)
팬더 패턴은 같은 해 까르띠에의 여성용 손목시계에 처음 등장합니다. 블랙 오닉스와 화려한 다이아몬드가 조합된 팬더 패턴에 상류층 여성들은 열광했습니다.
팬더가 처음으로 전신으로 구현된 건 그로부터 몇 년 후였습니다. 1917년 루이는 자신의 뮤즈이자 까르띠에의 파인 주얼리 책임자였던 투생에게 주려고 의미 있는 선물을 준비합니다. 블랙 바탕 케이스에 다이아몬드와 오닉스, 플래티늄으로 장식한 담배 케이스였습니다. 루이는 여기에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작은 팬더를 구현했습니다.
사실 팬더에는 투생과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 루이의 순애보가 담겨 있습니다. 1913년 루이는 투생의 감각적인 매력에 푹 빠져 그림도 못 그리는 투생을 액세서리 감독자로 채용합니다.
수십 년 간 지속된 루이와 투생의 관계는 까르띠에와 20세기 주얼리 디자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지만, 비극적인 사랑의 이야기이기도 했습니다.
투생은 비운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가 독일인 남성과 재혼하자 투생은 언니와 함께 집을 나왔습니다. 벨기에 브뤼셀로 간 투생은 퀸소나스 백작이라는 늙은 남성의 여자가 됐습니다. 그때 나이 15세였습니다. 당시 퀸소나스는 프랑스에서 추방돼 브뤼셀에 잠시 머물고 있던 것이었는데, 3년 후 파리로 되돌아 갔다가 투생을 차버립니다.
투생은 거기서 파리의 예술 세계와 디자인에 눈을 뜹니다. 사교계에서 스타일리시하고 창의적인 천재로 알려지면서 유명 패션 디자이너들과 일하게 됐고, 그때 루이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투생의 집안 배경 때문에 루이의 집안에서 결혼을 반대해 결국 루이는 1924년 헝가리 귀족 집안의 여성과 결혼했고, 투생은 1954년 피에르 헬리 도이셀 남작과 결혼해 남작 부인이 됐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의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사업 파트너로서 남으며 끝까지 마음 속 연인으로 지냈다고 합니다.
1933년 루이는 주얼리 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여성인 투생을 까르띠에의 파인 주얼리 디렉터로 임명, 하우스 내에서 팬더 라인의 입지는 더욱 확고해졌습니다.
투생은 까르띠에의 파인 쥬얼리 디렉터로서 넓은 인맥과 럭셔리한 안목으로 유럽·미국의 부유층과 엘리트 층 사이에서 사업성을 발휘해 까르띠에의 액세서리 사업을 확장시킵니다. 핸드백과 지갑, 쥬얼리 등 부유층 여성을 겨냥한 소품을 디자인해 스타일리시하고 시대를 초월한 필수품을 잇따라 선보였습니다.
업계에서는 팬더를 투생의 페르소나라고 합니다. 당시 투생의 별명은 ‘쁘띠 팬더’일 정도로 팬더 모피로 만든 전신 코트를 즐겨 입었다고 합니다. 루이가 바르비에의 ‘숙녀와 팬더’ 삽화에서 팬더를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고.
투생은 파인 주얼리 디렉터로서 팬더를 3차원적으로 확장합니다. 팬더를 주제로 한 커다란 브로치와 팔찌, 반지까지 고급스럽고 퇴폐적인 주제를 정교하게 만듭니다.
최초의 팬더 보석은 1948년 윈저 공작부인 월리스 심프슨이 의뢰해 만든 브로치였습니다. 카보숑 에메랄드가 세팅된 금과 에나멜 팬더 브로치는 당시 개성 강한 여성들 사이에서 주목을 끌며 입소문을 탔고, 반지와 드롭 귀걸이, 펜던트로도 제작돼 20세기 가장 상징적인 액세서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투생의 감각적인 집착이 까르띠에의 상징이 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1987년 월리스 심프슨이 사망한 이듬해, 세계적인 옥션 하우스 소더비는 ‘월리스 심프슨 주얼리 콜렉션’을 선보입니다. 총 214점이었는데, 1인이 소유한 보석판매로는 사상 최고가인 5350만 달러(4일 기준 약 650억 원)라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2010년 소더비는 심프슨의 까르띠에 보석 컬렉션 20점을 경매에 부쳐 1241억7369만 달러를 벌어들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예상가의 3배가 넘는 금액입니다. 그중 최고가는 단연 팬더였습니다. 다이아몬드로 된 팬더 팔찌가 700만 달러에 팔린 것입니다.
1950년대 후반 까르띠에가 심프슨을 위해 만든 팬더 브로치와 팔찌는 1987년 뮤지컬 제작자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사들였고, 2014년 경매에서 190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로이드 웨버는 아내였던 오페라 스타 사라 브라이트먼에게 선물하려 팬더 두 피스를 사는 데 거금을 썼다고 합니다.
투생 시대의 까르띠에 팬더 주얼리들은 디자인과 제작자, 소재의 가치를 인정받아 고급 주얼리 경매에 나오기가 무섭게 고가에 팔리고 있다고 합니다. 부유층에게는 소장품이지만, 팬더의 미학을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지금도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 여사가 착용한 브로치는 1949년 까르띠에가 윈저 공작부인을 위해 만든 것과 유사하지만, 모조품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까르띠에의 팬더 브로치는 팬더가 152.35캐럿짜리 사파이어 카보숑 위에 위엄있게 서 있는 디자인으로, 파베 사파이어와 화이트 다이아몬드, 옐로우 다이아몬드를 사용해 입체적으로 디자인됐습니다.
까르띠에 팬더 컬렉션의 진품은 가치가 수만 달러에서 수백만 달러에 이르기 때문에 모조품도 많이 나돌고 있습니다. 특히 시계 모조품이 많습니다.
우선 시계는 다이얼을 덮는 크리스탈에 스크래치 방지 유리를 적용했고, 나사는 모두 납작한 타입으로 케이스를 제자리에 고정하는 데 사용됩니다. 모조품은 일반적으로 스냅온 케이스와 함께 제공됩니다. 나사는 저렴한, 약간 둥근 십자 나사가 사용됩니다.
광채와 원석도 진품과 가품을 구분하는 기준이 됩니다. 까르띠에 시계에는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광택 소재인 루미노바가 사용되는데, 모조품에는 이런 고급진 소재가 적용되지 않아 빛이 약합니다.
까르띠에 팬더 시계 와인더 끝은 카보숑 스톤이 세팅되어 있는데, 와인더에 스톤이 없으면 가짜라고 합니다. 또 모든 까르띠에 팬더 시계에는 무브먼트에 브랜드명에 ‘r’가 새겨져 있습니다. 또 모든 정품에는 두 글자와 여섯 자리 숫자로 된 일련번호가 있는데, 이는 시계 뒷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모조품에는 일련번호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SWISS MADE’라는 글자가 6시 표지 아래에 있는데, 이 역시 없으면 가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