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필름페스티벌에 참석해 ‘우연과 상상’을 두고 전한 오묘하고도 정확한 표현이다. 5월 국내 관객을 만나는 ‘우연과 상상’은 제목 그대로, 예기치 못하게 마주친 주인공들의 욕망과 좌절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상상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25일 언론시사회를 열고 작품을 공개한 ‘우연과 상상’은 세 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이 걷어찬 남자친구를 다시 찾아간 ‘메이코’, 모종의 계약 때문에 노교수를 유혹하려는 유부녀 ‘나오’, 길에서 마주친 고교 동창으로부터 대반전을 경험하는 중년의 ‘나츠코’까지, 관객은 마치 세 여인의 은밀한 연애사나 숨겨진 고민을 엿듣는 듯한 흥미로운 감정을 느끼게 된다.
눈에 띄는 건 최소화된 연출과 단조로운 공간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각 에피소드의 공간 변화를 두세 차례밖에 주지 않고, 오직 배우들이 핑퐁처럼 주고받는 대사만으로 십 여 분 동안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저력을 보여준다. 각자의 욕망이 드러나고 감춰지기를 반복하는 대화의 여정에서 극 중 인물과 상황은 마치 실제로 존재할 것 같은 생동감을 확보하는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이야기의 화신’으로 평가할 만한 대목이다.
뉴욕필름페스티벌에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솔직히 말하면 이야기를 쓰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캐릭터끼리 서로 대화하게 만든 다음, 그들이 뭘 생각하고 욕망하는지 그럼에도 말로 뱉을 수 없는 건 무엇인지 생각했다”고 말이다.
그의 말처럼, ‘메이코’, ‘나오’, ‘나츠코’의 욕망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는다. 다만 감독은 그들의 좌절이나 부도덕함을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고, 때로는 이야기를 덩어리채 생략하는 과감한 기법을 쓴다. 망신이 예고된 주인공의 미래에서 시간을 몇 년쯤 건너뛰어 버리는 식이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사연을 이야기 그 자체로 즐기되 이런저런 평가는 하지 않는, ‘선을 넘지 않는 즐거움’이다.
감독은 ‘우연과 상상’이 프랑스 영화감독 에릭 로메르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라고 했다. 전작 ‘아사코(2018)' 프랑스 상영 당시 에릭 로메르 감독 영화의 편집감독 메리 스티븐스를 만났는데, 그때 ”짧게 만드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됐다”는 것이다. 생략하고 거둬내야만, 장편 영화 안에서 작품만의 독특한 운율을 재조직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방향성은 ‘우연과 상상’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작품의 백미는 웃음과 희망이 공존하는 세 번째 에피소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생은 서로의 오인을 풀고 마음의 빗장을 연다. 고민 없어 보이는 삶에도 아픔은 있고, 그럼에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릴 이유는 없다는 단단한 메시지를 전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이 에피소드를 두고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나쁜 방법을 이용하지 않아도, 우연은 당신을 예상치 못한 장소로 데려가 놀라움을 안길 것”이라고 했다.
‘우연과 상상’은 다음달 4일 개봉한다. 15세 관람가. 러닝타임 121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