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시진핑 국가주석 1인 집권 체제가 유지되면서 리커창 총리의 존재감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다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주목을 끌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중국의 잊혔던 총리가 경제 해결사로서 시진핑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있다”고 리커창의 귀환을 조명하기도 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이번 주 리 총리가 시장과 일자리 안정화 관련 회의에서 “중국이 거시적 정책 조정을 강화할 것”이라며 “우리는 경제가 직면한 도전에 대처할 수 있는 충분한 정책적 여유가 있다”고 전했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은 지난 9년여 간 시진핑은 자신에게 권력을 집중시켰으며 국무원(정부)인 리커창이 담당해야 할 거시경제 정책을 둘러싼 권한도 유명무실해졌지만, 최근 1개월 만에 그 양상이 일변했다고 지적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지난 14일 제2면 거의 모두를 할애해 1만 자 가까운 리커창 총리 연설 전문을 실었다. 1만자에 가까운 문장은 4월 25일 ‘국무원 제5회 청정(깨끗한 정치) 공작회의’ 연설 내용이었다.
3주일 전의 연설이 지금에 와서 대대적으로 실린 것에 대해 닛케이는 “분명한 변화의 실마리이며 내용보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연설을 크게 취급한 것”이라며 “시 주석의 강한 권력과의 균형을 맞추려는 움직임일 것”이라고 풀이했다.
시 주석이 고수하는 제로 코로나 정책의 실패가 리커창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면서 당내 권력투쟁의 서막이 열리게 됐다는 분석도 있다.
원래 중국은 5년마다 열리는 공산당 전국대표대회(당대회)를 앞두고 차기 정권을 둘러싼 주도권을 쥐기 위한 치열한 물밑 투쟁이 벌어졌다.
시진핑이 전임자인 후진타오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던 2012년 18차 당대회를 앞두고도 그해 초 시 주석의 라이벌이었던 보시라이의 쿠데타 모의가 드러나 베이징 정가에 큰 파문이 일어났다.
2017년 당대회에서는 리커창 총리의 세력인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의 핵심 인사인 리위안차오 국가부주석이 관례적인 은퇴 연령인 68세가 되지 않았는데도 경질됐다. 리위안차오는 후진타오 시절, 룰에 따른 권력 승계 시스템 마련에 힘썼지만, 시진핑 시대 들어 그 실적은 모두 뒤집혔다.
이후 리커창은 자신과 공청단의 몰락을 쓸쓸히 지켜보는 신세가 됐다. 공청단 수는 전성기인 2012년 말에 8990만 명으로 공산당원(8512만 명)보다도 많았지만, 2021년 말에는 7371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같은 기간 공산당원 수는 1000만 명 이상 늘었다.
후진타오와 리커창, 꾸준히 시 주석의 후계자로 거론되는 후춘화 부총리에 이르기까지 공청단 출신 인사들은 3연임, 더 나아가 종신집권을 꿈꾸는 시진핑 주석에게는 가장 어려운 라이벌들이다. 시 주석이 집권 내내 공청단 세력 약화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충격적인 중국 경제 상황에 시 주석의 입지도 그만큼 흔들리게 됐다. 상하이 봉쇄 여파로 지난달 산업생산과 소매판매가 모두 마이너스로 떨어졌다. IT와 부동산, 사교육에 이르기까지 여러 산업에서 시 주석이 주도한 규제 철퇴도 중국 경제를 추락하게 한 요인으로 꼽혔다.
리 총리는 최근 “부동산 시장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토지와 주택 가격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며 부동산 규제 완화를 시사했다. 또 디지털 경제와 기업 국내외 상장에 대한 지원을 거듭 강조하는 등 경제 정책에 있어서 시 주석과 전혀 다른 행보를 보였다.
이는 시 주석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일 수도 있다. 닛케이는 “리커창이 은퇴 연령에 따른 임기제한 규정에 내년 봄 총리직에서 내려올 예정이나 다음 5년간 상당한 중책을 맡을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내다봤다. 시진핑이 지금과 같은 1인 집권 체제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본 것이다.
시진핑은 워낙 1인 집권 체제를 확고히 구축해놓아서 올해 당대회에서 3연임이 무난하게 점쳐졌다. 그러나 사임설에서 건강이상설까지 각종 소문이 무성하게 번지면서 최근 균열이 일어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인도 ANI통신은 14일 중국 소셜미디어에서 경기침체와 더불어 엄격한 제로 코로나 정책에 따른 경기침체로 시 주석이 사임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시진핑 주석 사임설을 담은 동영상이 중국 당국 검열로 삭제되기 전에 소셜미디어에서 돌았다고 소개했다.
캐나다에 있는 블로가가 만든 동영상은 “당대회에 앞서 시 주석이 물러날 수밖에 없으며 리커창 총리가 시진핑을 대신해 당과 정부의 일상적인 운영을 맡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인도 언론매체 보도여서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중국 내에서 제로 코로나에 대한 반발이 커지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뉴스위크는 17일 시 주석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문이 해외 중국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떠돌고 있다고 전했다. 뉴스위크는 지난주 영국 타블로이드지인 데일리메일과 더선 보도를 인용해 68세에 흡연자인 시 주석이 뇌동맥류 진단을 받았지만, 위험 때문에 수술을 거부하고 중국 전통 약품으로 치료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소개했다.
단지 소문들에 불과하나 공교롭게도 리커창이 다시 전면에 등장한 시점에 나오면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중국 경제를 진두지휘할 기회를 다시 잡은 리커창이지만, 그가 직면한 도전은 만만치 않다.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이다. 당대회는 10월 또는 11월 개최될 예정이다. 이 짧은 시간 동안 경제를 살리기는 쉽지 않다.
골드만삭스 등 전 세계 투자은행들은 최근 줄줄이 중국 경제성장률 전망을 하향 조정하고 있다. 중국 정부는 올해 성장률 목표를 ‘5.5% 안팎’으로 제시했지만, 전문가들은 잘해야 4%대가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리 총리가 기술기업과 부동산업체에 대한 규제 조치를 철회하는 등 시 주석 정책 중 일부를 뒤집더라도 그 효과가 당장 나타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현재 경제 발목을 잡고 있는 제로 코로나 정책에 대해서도 시 주석은 강하게 이를 고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상하이가 내달 1일부터 봉쇄 해제를 추진한다고는 하지만 중국 내 다른 도시에서 코로나19가 퍼지면 도시 봉쇄 악몽이 재연될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만큼 인프라 투자나 세금 감면 등 어떤 지원책을 펼쳐도 중국 경제가 이전의 활력을 되찾기는 쉽지 않은 상황이다.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리커창의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는지에 따라 중국의 미래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WSJ는 리커창과 가까운 사람들이 그에 대해 시장 자유화를 수용하면서 이념보다는 실용주의에 더 많이 몰두하는 유능하지만 신중한 정치인으로 묘사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총리로서 리커창은 막대한 은행 대출을 억제함으로써 중국의 빚에 의존하는 경제성장 모델을 바꾸려 했다. 또 국영기업을 축소하고 더 효율적으로 만들며 농민공 가족이 도시에서 교육과 기타 혜택을 더 쉽게 받기를 원했다. 바클레이스는 이런 리커창의 경제 정책을 ‘리코노믹스’로 명명했다.
‘공동부유’를 강조하면서 시장보다는 사회주의에 초점을 맞추는 시 주석과 리 총리는 분명히 대척점에 서 있다.
시진핑이 주석과 총리 사이의 전통적인 분업을 뒤집고 경제 분야도 장악하면서 리커창은 리코노믹스를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리 총리는 결국 은퇴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마지막 기회를 겨우 확보하게 된 것이다.
WSJ는 “시진핑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유지할 것”이라며 “그러나 리커창은 자신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되면 시 주석과 균형을 맞출 후임 총리를 선택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리커창마저 경제를 살리는 데 실패하면 중국은 물론 그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시 주석의 운명도 더 불확실해질 수 있다. WSJ는 “경제가 계속 침체되면 공산주의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공산당이 지금처럼 확고한 지배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배경에는 개혁개방과 그에 따른 경제 성장 과실이 있었기 때문이다.